이 꼴 저 꼴 보기도 싫고 이러쿵저러쿵 거들고 싶지도 않다. 다투고 시비 가려 무엇하랴, 내가 한 발 물러나면 그만인 것을. 그래서 훌쩍 떠났다. 혼자만 아는 숲, 깊숙한 곳에 다다라 호숫가 바위 위에 엎드려 물을 바라본다. 물을 보는 것인지, 물에 비친 나를 보는 것인지, 아니면 물을 보는 척하며 더 먼 곳을 내다보는 것인지. 허리 힘을 빼고, 한쪽 다리를 끌어당긴 품새로 보아 한참을 이렇게 물을 보고 있었고, 한동안 더 물만 바라볼 듯하다.
조선 초기 화단에서 안견이 화원화가를 대표한다면 사대부 출신을 대표하는 화가는 두말할 나위 없이 강희안(1417~1464)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물을 바라보는 선비 그림이다.
선비는 자세도 편안하지만 그 표정이 더없이 천연덕스럽다. 약간 벗겨져 널찍한 이마에 사람 좋아 보이는 펑퍼짐한 코, 반만 뜨고 반은 감은 눈, 인자해 보이는 입매와 수염…. 느긋한 그 얼굴에 보는 이까지 마음이 가라앉고 덩달아 옅은 미소가 감돈다. 약간 구부러진 선비의 무릎은 다리 옆에 놓인 바위와 꼭 닮았다. 바위와, 자연과 혼연일체가 된 그의 마음을 대변한다. 그러고 보니 턱 괸 선비의 품 낙낙한 옷 소매 주름은 그가 몸 댄 바위 절벽과 흡사하다. 요동치는 세파에 꿈쩍 않는 심지도 분명 같을 것이다.
굳건한 바위처럼 멈춘 듯한 그림이지만 그 안에서 바람이 느껴진다. 흔들거리는 넝쿨 줄기 때문이다. 위쪽 절벽에서 늘어진 것이 선비가 걸터앉은 바위 언저리까지 내려왔다. 바람에 움직이는 넝쿨과 거의 같은 속도로 물결이 일렁이고 있다. 물의 움직임은 자연의 순리 그 자체를 말해주는 것이기에, 선비가 물을 바라보는 것은 곧 자기수양의 과정이다. 논어 ‘자한편’에서 공자는 흐르는 강을 보며 “흘러가는 것이 물과 같아 밤낮으로 멈추지 않는다(逝者如斯夫 不舍晝夜·서자여사부 불사주야)”고 했다. 쉬지 않고 흐르는 물을 보며 다 이루지 못한 자신의 이상을 위해 애쓰겠다는 다짐이다. 그런가 하면 노자는 ‘도덕경’에서 “세상 으뜸의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상선약수)”며 “뭇사람이 꺼리는 낮은 곳에도 기꺼이 머무르니 도에 가깝다”고 이야기했다. “물을 바라보며 마음을 씻어낸다(觀水洗心·관수세심)”고 한 장자, “흐르는 물은 앞에 놓인 구덩이 하나하나를 모두 채우지 않고는 나아가지 않는다”고 한 맹자까지 현인들은 물을 보며 군자의 덕을 생각했다. 그래서 바위 위의 저 선비도 물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단순하고 거친 구성이지만 담백한 문기(文氣)와 품격이 그림에 가득하다.
강희안은 조선 초기의 문인화가다.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고려 공양왕의 사돈이고, 할아버지는 고려와 조선 두 왕조 모두에서 높은 벼슬을 지냈다. 이모가 세종대왕의 비(妃)여서 왕의 처조카이며 따라서 안평대군과는 외종지간이었다. 강희안은 두 살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려 인물화 외에도 곤충,새,나무,산수도 잘 그렸다고 전한다. 1441년 문과급제로 관직에 올라 집현전을 무대로 박팽년,신숙주,성삼문 등과 더불어 활동했다. 외교 사절인 사은부사(謝恩副使) 자격으로 중국 연경에 가 예술적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훈민정음’ 편찬에 참여했고, 문장력이 빼어나 ‘용비어천가’에 주석을 붙였다. ‘용비어천가’로 말할 것 같으면 조선 왕조 목조부터 태종까지 6대 임금의 업적을 중국 역대 제왕의 치적과 대구를 이루게 125장의 한글가사와 그에 해당하는 한시로 읊은 글이다. 조선 건국의 당위성과 후대 임금에게 경계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중요한 책에 주석을 달았을 정도니 강희안의 글재주는 당대 최고 수준이었음을 방증한다. 그가 쓴 전서체로 옥새가 제작됐고, 그의 글자로 주조한 불경도 전한다. 이처럼 시(詩)와 글씨(書), 그림(畵) 모두에 뛰어나 당대의 삼절(三絶)로 불린 강희안의 실력을 두고 조선 전기의 문인 서거정(1420~1488)은 “당시 남이 감히 따를 수 없는 뛰어난 경지”라며 극찬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은 천한 재주로 치부됐다. 글씨 솜씨도 자랑거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강희안이 ”자제들 중에 글씨와 그림을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답하기를 ‘서화는 천한 기예니 후세까지 전해져도 단지 이름을 욕되게 할 뿐”이라고 한 일화가 그의 ‘행장(行狀)’에 전한다. 그 뜻대로 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이 ‘고사관수도’와 화첩 ‘화원별집’에 실린 ‘교두연수도’, 간송미술관의 ‘청산모우’ 등 현재까지 남아있는 그의 작품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드물다. 이름을 욕되게 하기는커녕 그림에 대한 목마름만 키울 뿐이다.
대신 그가 쓴 우리나라 최초의 원예서 ‘양화소록(養花小錄)’이 전하고, 번역된 글이 지금도 읽히고 있다. 화초의 성품과 재배법을 기록한 이 책에서 저자는 “화초는 한낱 식물이나 배양하는 이치와 거두어들이는 법을 모르면 안 된다. 그 천성을 어기면 반드시 시들어 죽을 것이니 하찮은 식물도 이러한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어찌 그 마음을 애타게 하고 그 몸을 괴롭혀 천성을 어기고 해치겠는가”라며 집필 의도를 밝혔다. 옮겨 심을 때 굵은 뿌리가 끊기면 쓰러지고 마는 노송에 빗대 옛 법을 함부로 뜯어고치는 조변석개(朝變夕改)를 지적하고, 대나무 수천 그루가 들어선 대숲을 보고서는 대나무 분재와 묵죽 그림도 치워버렸다는 깨달음을 이야기하는 등 ‘양화소록’은 원예서의 형식을 취했으나 실상은 강희안의 철학서에 가깝다. 특히 연꽃 재배에 관한 부분에서는 이렇게 적었다.
“사람이 한 세상에 나서 오직 명예와 이권에만 골몰해 늙도록 헤매고 지치다가 쓸쓸히 죽어가니 이는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 벼슬을 떠나 속세의 때를 벗어버리고 저 한가로운 강호에 나가지는 못할지라도 공무를 마치고 나와서는 시원한 바람과 맑은 달빛 아래 그윽한 연꽃 향기 속에서 앞가슴을 활짝 헤치고 휘파람도 불고 시도 읊으며 이리저리 거니노라면 몸은 비록 얽매였다 할지라도 정신만은 세속 밖을 노닐 수 있는 것이다.”
강희안이 쓴 ‘양화소록’의 글귀를 읽고 다시 ‘고사관수도’를 보면 그림 속 선비는 바로 화가 자신이다. 실록 등 여러 문헌기록에 따르면 강희안은 둥글둥글한 인상에 조금 뚱뚱하며 돼지고기를 즐겨 먹었다고 한다. 게으르지는 않았을 터인데 집현전에서 매월 지었어야 하는 시를 짓지 않아 성삼문(1418~1456)의 놀림을 받은 적 있을 정도로 천성이 담담하고 낙천적이었다고 하니 영락없는 그림 속 고사(高士)가 분명하다. 그는 ‘주역’의 “홀로 서 있으나 두려울 것 없고 세상을 피해 은둔하고 사니 걱정 없다”는 ‘독립불구 둔세무민(獨立不懼 遁世無悶)’을 이룬 듯하다. 팍팍하게 사는 현대인은 홀로 서는 ‘독립’도, 주변에 휘둘리지 않는 ‘둔세’도 쉽지 않으니, 그래서 더욱 귀히 여겨지는 그림이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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