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2,000조원에 달하는 투자 여력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협상 카드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주목된다. 국내 기관투자가들의 선진국 대체투자 붐이 인프라 투자가 절실한 도널드 트럼프 정부에 당근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박희준(사진) 에너지이노베이션파트너스 대표는 18일 서울경제신문과 인터뷰에서 “사업가 출신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오랜 적대국인 중동에 투자를 통한 협력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면서 “국내 기관투자가는 수익률을 위해 어차피 미국의 인프라에 투자해야 하는데 이는 우리 정부가 대미 협상에서 우리의 주장을 강화하는 밑바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에너지 인프라에 투자하는 국내 에너지 기업과 기관투자가에 자문 역할을 하고 있는 박 대표는 지난 2013년까지 미국 최대 가스 생산회사인 에퀴타블의 전략 담당 부사장을 지냈다. 삼성그룹에 입사한 후 미국 피츠버그 카네기멜런대에서 경영학석사(MBA)를 획득하며 2001년 에퀴타블에 입사했다. 미국 에너지 산업과 투자은행(IB) 업계에서 일한 그는 현재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에너지위원을 맡고 있다. KB금융그룹의 미국 펜실베이니아 가스복합화력발전소 금융주선(약 2,200억원), 국내 금융회사 중에서는 처음으로 미국 태양광 발전에 투자한 하나금융투자의 행보 뒤에는 에너지이노베이션파트너스가 있었다.
박 대표는 최근 기관투자가들에 국가 리스크가 적으면서 우리와 발전 제도가 유사한 미국을 새로운 인프라 투자처로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는 “트럼프 행정부가 우리 돈 400조원에 가까운 규모로 에너지 인프라에 투자하겠다고 공약하면서 한국의 큰손을 향한 미국의 손짓이 커졌다”고 평가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올 6월 방미 과정에서 국내 기업을 통해 미국에 5년간 4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선물 보따리를 풀었다가 진보진영 일부에서 비난을 받았지만 국익을 위해서는 필요한 전략이라는 주장이다. 박 대표가 추산하는 연기금·공제회·보험·은행 등 국내 기관투자가의 투자 여력은 총 2,000조원대. 문 대통령의 두 번째 방미 기간인 18일부터 국민연금·한국투자공사 등 국내 대형 기관투자가 대표들이 뉴욕에서 투자설명회를 열어 ‘비지니스 외교’를 펼치고 있다.
박 대표는 미국 내 투자 수요는 높아졌지만 공급은 부족한 상황이 한국에 유리한 국면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미국 내 기관투자가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2010년에 만든 도드프랭크법(월스트리트 규제 및 소비자보호법) 때문에 위험자산으로 분류되는 에너지 인프라에 투자가 제한돼 있다”며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이 개정을 추진하고 있지만 실제 개정안 시행까지는 최소 수년이 걸리기 때문에 지금이 투자 적기”라고 강조했다. 틈새 전략을 노려 미국보다 싼 금리로 자금을 끌어들일 수 있는 일본이나 중국계 자금도 한때 미국의 에너지 인프라에 앞다퉈 투자에 나서고 있다. 다만 박 대표는 안정성을 위한 포트폴리오 다변화 차원에서 미국 한 곳에 몰아주기 투자는 곤란하다고 덧붙였다.
미국의 발전소 등 에너지 인프라 제도가 한국과 유사하다는 점도 한국 기관투자가들에 장점이다. 박 대표는 “한국의 발전제도는 8년 전 미국의 제도를 기반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해외 투자라도 유사하다”면서 “미국의 발전소들은 100년 이상 노후돼 개발 수요가 많고 한국의 은행·발전소 등의 투자가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에서는 국민연금처럼 대규모 큰손이 일부 해외 인프라 투자를 시도했지만 아직은 걸음마 수준이다. 대부분의 기관투자가는 글로벌 대형 자산운용사가 운용하는 수조원 단위의 블라인드 펀드에 수십곳의 투자자 중 하나로 이름을 걸고 있다. 그나마 해외 에너지 인프라 투자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인 편이다. 2008년 이후 이명박 정부가 자원외교를 중점 추진하면서 국내 에너지 공기업과 민간에서 북미 지역의 셰일가스나 샌드오일 등에 투자가 이어졌지만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박 대표는 지금이야말로 장기 투자가 필요한 시기라고 말한다. 그는 “과거에 국내 일부 투자자가 잘못 선택해 손실을 회복할 수 없는 거래가 있었다”면서도 “과거 역마진이 나던 미국의 셰일가스와 샌드오일이 가격 안정과 기술력 확보로 수익을 내기 시작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미국의 셰일가스가 중동의 석유를 제치고 유가를 결정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임세원기자 wh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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