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한국 경제는 사면초가다. 안으로는 조선·해운·자동차 등 기존 주력산업의 부진과 내수·고용·투자 침체가 계속되고 있고 밖으로는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 후폭풍으로 기업들의 피해가 커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지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경제 상황이 가장 안 좋다는 지적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서울경제신문은 현재 한국 경제의 상황과 해결 방안을 진단하기 위해 이필상 전 고려대 총장, 박재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의 특별대담을 마련했다. 이 전 총장은 한국의 1세대 시민운동가이자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경제 석학이며 박 전 장관은 기획재정부·고용노동부 장관, 국회의원 등을 두루 거친 경제 전문가다. 두 전문가는 경기진단부터 구조개혁, 노동개혁, 통상 이슈, 금융 안전성, 문재인 정부 경제정책까지 폭넓은 주제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대담은 18일 서울경제신문사에서 이뤄졌다.
/사회=이철균 경제부장 fusioncj@sedaily.com
△사회=한국 경제가 대내외적으로 어려움이 많아 1997년 외환위기와 비견된다는 의견도 제시된다. 현 경제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이필상 전 고려대 총장=1997년 위기에 비해 겉으로 보는 여건이 좋은 건 사실이다. 당시에는 기업부채가 500%를 넘었는데 지금은 100% 수준으로 떨어졌다. 외환보유액은 3,800억달러로 1997년의 300억달러보다 크게 늘었다. 하지만 이런 숫자만 보고 현 상황을 낙관하는 것은 굉장히 단기적인 시각이다. 2017년 위기는 주력산업이 붕괴하면서 경제를 안고 떨어지는 산업위기이기 때문이다. 또 1997년은 긴급자금을 투입해 회복할 수 있는 급성 위기였지만 지금은 회복을 장담할 수 없는 만성 위기라는 차이도 있다. 그런 점에서 1997년보다 더 위험한 상태라고 본다.
△박재완 전 기재부 장관=현재의 위기가 구조적이고 만성적인 위기라는 데 동의한다. 우리 경제는 제조업 의존도가 여전한 가운데 후발 국가와의 기술격차가 현격히 줄었고 서비스업은 여전히 낙후한 상태다. 미래 먹거리도 찾지 못했다. 상황을 타개할 구조개혁은 지지부진한 정도가 아니라 뒷걸음치고 있다. 이대로면 내수·수출·금융 등 경제 전반이 무너질 수도 있다.
△사회=풍족한 외환보유액 등을 감안하면 적어도 채무불이행과 같은 사태는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이 전 총장=외환보유액이 많다고 안심할 상황이 아니다. 우리 증권시장은 외국자본 의존도가 높다. 전체 시장의 3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의 규모는 외환보유액인 3,800억달러보다 많은 상황이다. 더구나 최후의 금융 안전망인 통화스와프 기반도 빈약하다. 최근 중국과 통화스와프가 연장됐지만 큰 의미는 없다. 위기 때는 달러를 조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달러를 조달할 수 있는 유일한 장치가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MIM)인데 이마저도 자금조달을 위해서는 회원국의 동의가 있어야 해 실효성이 약하다. 대내외 리스크가 더 커지면 급격한 자본 유출이 일어날 수 있다.
△사회=어디서부터 문제를 풀어가야 하나.
△이 전 총장=잠재성장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산업발전정책부터 시작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1번 국정과제로 소득주도성장을 제시했는데 한계가 있다. 재정을 확 풀면 경제의 마중물 역할을 해 시장이 살아난다는 건데 문제는 우리 경제가 소득주도성장을 할 수 있는 수용력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재정이 마중물이 되려면 우물물을 끌어올릴 수 있는 성장동력, 즉 펌프가 있어야 하는데 이게 고장 났다. 이런 상황에서 재정을 부어봐야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다. 따라서 기존 주력산업을 과감하게 구조조정하고 신산업을 육성하는 등 구조개혁이 선행돼야 한다. 4차 산업혁명의 경우 우리나라는 실물산업·정보통신 등이 발달해 있어서 적극 투자하면 승산이 있는데 우왕좌왕하고 있으니 답답하다. 산업정책을 앞세워 5개년정책과 예산을 새로 짜야 한다.
△박 전 장관=이 전 총장의 말씀대로 구조개혁이 절실하다. 정부 규제부터 교육훈련, 노동, 정책금융, 기업문화와 운영 시스템, 자격면허, 복지 등 전방위에 걸쳐서 총요소생산성을 끌어올리는 개혁이 시급한데 이런 작업이 더디다 못해 후퇴하고 있는 실정이다. 예를 들어 정부가 최저임금 1만원을 만들기 위해 개입하고 인상분을 재정으로 지원하는 것, 중국이나 베트남에서도 이렇게는 안 한다. 이런 걸 보면 예전에는 관치경제라고 했는데 지금은 관제경제 수준까지 나아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정부의 민간에 대한 간섭과 영향력을 확 줄여야 한다. 예컨대 우리나라는 구시대적인 규제 때문에 우버로 대표되는 공유경제와 같은 새로운 산업이 진입을 못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정부의 인허가 권한도 확 줄일 필요가 있고 각종 전문자격증, 특허 등이 구축한 기득권도 축소해야 한다. 이를 통해 시장 친화적 경제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것이 시급하다.
△이 전 총장=시장 친화적 시스템으로의 개혁이 시급하다는 얘기는 맞다. 하지만 전제가 있다. 우리나라는 정치권력의 시장 간섭, 대기업 등 자본권력의 지배력이 심하다. 이런 상황에서 시장 친화적으로 가면 힘 있는 사람이 더 횡포를 부리게 된다. 기존 권력의 지배력 해소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사회=산업개혁·정부개혁 외에 중요한 구조개혁 과제는.
△박 전 장관=노동개혁을 꼽겠다. 우리 노동시장 시스템은 내부자들, 특히 힘 있고 돈 많이 버는 노동자를 중심으로 고용안정, 임금 인상, 사회복지를 논의하는 근시안적인 패러다임에 머물러 있다. 이렇다 보니 노동운동이 활성화될수록 청년 취업난과 비정규직 차별, 대·중소기업 간 임금격차가 심화하는 역설이 일어난다. 여기에 통상임금 문제를 비롯해 최저임금 산입범위, 근로시간 단축 등 주요 노동 이슈들이 오랜 시간 정리되지 않아 기업들의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노동비용은 커지고 유연성이 확보가 안 되니까 기업 입장에서는 사람을 뽑는 게 토지나 부동산과 같은 고정자본 투자와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이다. 노동 유연성을 대폭 확대하고 현장의 자율성과 합의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법·제도를 업그레이드하는 것이 시급하다.
양극화 해소 정책도 방향이 문제다. 복지가 취약계층을 집중 지원하지 않고 보편적으로 지원하니 소득재분배가 더 악화되는 측면이 있다. 우리나라는 중산층 이상 상위계층의 복지 수혜가 저소득층보다 더 크다는 연구도 있다. 세금 제도에서도 근로소득 최상위 10%가 90%의 세금을 내는 구조다. 세원이 특정 계층에 편중돼 있으면 조세의 재분배 효과가 약해진다. 정부 정책을 실질적으로 양극화 해소에 기여할 수 있게 개편할 필요가 있다.
△사회=미국 등에서 커지는 통상압박도 새로운 위험요인이 됐다.
△이 전 총장=정부 통상정책의 실패라고 본다. 우선 판단능력이 부족했다. 6월 말 정상회담을 할 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재협상 중이라고 기자회견을 했다. 그런데 우리 측은 재협상을 한 적이 없다고 정면 부정했다. 결과적으로는 폐기 논의까지 이르고 우리에게 굉장히 불리한 상황이 됐다. 통상전략도 부실하다.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자마자 미국으로 가서 경제·안보 등 모든 분야에서 단단한 파트너십을 이끌어냈다. 우리 정부는 한미동맹이 굳건하다는 말만 하고 얻은 것은 하나도 없다. 중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AD·사드) 보복에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고. 한마디로 미국과 중국 등의 무역전쟁 포로가 된 상황인데 이런 상황이 심화되면 수출 호조세마저 꺾일 수 있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박 전 장관=통상 현안에서 단시간에 문제를 개선하는 것은 쉽지 않다. 결국은 신뢰 문제다. 한국의 전략적 가치에 대해 미국이나 중국이 우선순위를 높게 부여할 수 있게 평소에 우호 동맹관계를 확실히 해둬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외교·통상 문제를 국내 정치적 문제 때문에 그르치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예전에 태국에 6조원 규모의 물관리 시스템 사업 수주 과정에서 우선협상대상자 직전까지 갔는데 4대강 논란 때문에 국내 여론이 좋지 않고 시민단체는 현지까지 가서 시위도 하고 해서 무산된 경우도 있지 않나. 우리나라는 글로벌 무대에 플레이어다.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우물 안 정치공학이라 할까, 그런 것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정리=서민준기자 morandol@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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