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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인의 예(藝)-<33>도상봉 '국화']가을을 따라온 싱그러운 국화...지친 마음을 보듬다

다독거린 붓터치 잔잔하고 그윽

은은한 색조 수묵화 기법 연상

도공 손맛 느껴지는 볼록한 백자

서정적인 색조로 안정감 잡아줘

도상봉 ‘국화’ 1975년작, 65x53cm 캔버스에 유채.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종로구 인사동에 즐비한 화랑 중에서도 ‘선화랑’은 역사나 영향력 면에서 단연 터줏대감으로 통한다. 1977년 선화랑을 연 창업자 고(故) 김창실(1935~2011) 회장은 이화여대 약학과를 졸업한 후 약국을 운영하던 약사 출신이다. 미술 애호가였던 김창실은 인사동 거리가 비포장도로이던 1950년대부터 그림 보러 다니길 즐겼다. 눈 호사가 기뻤을 뿐 선뜻 그림 살 엄두는 내지도 못하던 그녀가 1965년에 처음으로 그림 한 점을 품에 안았다. 둥그런 백자 항아리 위로 하얀 꽃송이들이 흘러넘치듯 탐스럽게 피어오른 도상봉(1902~1977)의 ‘라일락’. 10호 크기였으니 폭 50㎝ 안팎의 작은 그림 앞에서 그녀는 눈을 떼지 못했고 몇 번을 다시 찾아가 보고 또 보다가 마침내 지갑을 열어 수년간 모은 돈 1만원을 내놓았다. 첫 컬렉션이었다. 이후 늘어난 그녀의 수집품은 300점에 이르렀고 급기야 화랑까지 설립하게 됐다. 화랑 1세대로 국내 미술 시장 본격화의 포문을 연 김창실은 미술 대중화를 위한 계간지 ‘선 미술’ 창간, 젊고 실험적인 작가 육성을 위한 ‘선미술상’ 제정 등으로 ‘미술계의 대모’라 불렸다. 영화계에서 여배우 트로이카를 칭하듯 1980년대에는 ‘화랑가의 진선미’가 회자됐는데 선화랑을 주축으로 앞서 1972년 개관한 고(故) 유진 대표의 진화랑, 1977년 문을 연 이난영 대표의 미화랑을 아우르는 표현이었다. 한국화랑협회 회장까지 역임한 김 회장은 2009년 옥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이 모든 것이 그림 한 점, 도상봉의 ‘라일락’에서 시작된 인연이었다.

도상봉 ‘동해풍경’ 1973년작, 24x33.4cm 캔버스에 유채.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가을을 따라온 국화 한 무더기가 꽃을 피웠다. 노랗고 하얀 국화가 백자 항아리를 빽빽하게 비집고 나왔다. 싱그럽고 명랑하다. 화려하기보다는 정겹다. 도상봉이 1975년에 그린 ‘국화’다. 꽃이라는 것이 마음을 들뜨게 하기 마련이건만 도상봉의 국화는 오히려 마음을 쓰다듬어 평정을 찾게 한다. 특유의 안정감은 백자 항아리가 잡아주고 있다. 백자라 불리나 하얗지 만은 않은 유백색이며, 둥글지만 울룩불룩 휘기도 한 표면에서 도공의 손맛이 느껴지는 자기다. 사실 그림에서 가장 빛나는 지점은 꽃이 아니라 볼록한 항아리에 있다. 색조가 화려하지 않지만 화면은 환하다. 어둑한 듯 단조로운 배경을 뒤로하고 자기와 꽃이 모습을 드러내 서정성을 보여준다. 분류하자면 고전주의, 학교에서 배운 전통에 충실한 아카데미즘에 속하는 그림이다.

고백하건대 필자가 어려서 그랬는지 균형과 조화의 미학을 펼친 이런 그림을 두고 촌스럽고 답답하다는 생각을 품었던 적 있다. 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해방과 전쟁 이후 “잘 살아보세”를 외치던 고단한 그 시절에는 도상봉의 이 온화하고 안정적이다 못해 고상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이 그림은 위안과 행복 그 자체였을 것이다.

도상봉 ‘한정’ 1949년작, 116x90cm 캔버스에 유채.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화가는 캔버스를 펼쳐두고도 마치 얇은 꽃잎 위에 그림을 그리듯 살살살 붓을 놀린 모양이다. 칠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독거린 붓터치가 잔잔하고 그윽하다. 은은하게 퍼져간 붓질이 수묵화 기법을 연상하게 한다. 정물화, 그것도 화병에 꽂힌 꽃 그림은 특별하기가 쉽지 않다. 그림이 꽃 자체의 자연미를 능가하기가 어려운 데다 감성이 과하면 천박하거나 속물스러워진다. 도상봉은 이런 한계를 깼고, 원 없이 꽃을 그렸다. 라일락과 국화뿐 아니라 안개꽃, 장미, 수국, 튤립, 카네이션, 장미, 붓꽃, 개나리 등을 즐겨 그린 도상봉의 생각은 뚜렷했다. “꽃 보기와 그리기를 좋아하는 것은 예로부터 인간은 누구나 꽃을 좋아하고 그 아름다움을 동경해 왔을 뿐 아니라 이를 통해 감성을 부드럽게 하고 우리 심정에 더할 수 없는 행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이들 꽃은 한결같이 백자 항아리에 꽂힌다. 도상봉 자신이 백자 애호가였고 뛰어난 감식안의 소유자였다. 김환기가 자신의 수필에 “새로 도자기를 구입하면 반드시 도상봉 선생을 모시고 와서 보였다”고 적었을 정도다. 특히 조선백자가 띠는 유백색의 미감을 “신비한 기쁨”이라며 “한국적 빛깔이며 멋과 정취”라고 한 도상봉은 사랑하고 좋아한 꽃과 항아리를 그리되 조금 떨어져 지켜보는 관조의 미학을 펼쳤다.



도상봉은 1902년 함경도 홍원에서 당시 관북지역 최대 기업인 ‘덕흥상회’를 운영하던 도명수 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도명수는 민족주의 투사이자 사업가였다. 도명수가 젊은 점원으로 일했던 점포의 사장은 서울역에서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지고 사형당한 독립투사 강우규였다. 그 영향을 받은 도명수는 독립군에게 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복역하는 등 지속적 감시를 받았다.

부전자전이다. 아들 도상봉은 보성고등보통학교 재학시절이던 1918년에 일본인 교사 배척을 위한 동맹휴학에 앞장서고 1919년 3·1운동 때는 출판과 보안법 위반으로 10대 학생 신분이었음에도 수개월 옥고를 치렀다. 자강을 위한 실력양성을 위해 도상봉은 근대 신문물을 배우겠다며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도쿄에 자리를 잡고 명치대 법학과에 입학하지만 교양수업으로 듣던 서양미술사에 빠지면서 특히 서양화의 계몽주의, 고전주의에 매혹된다. 민족의 자각이 반드시 정치나 법률을 통해 이뤄지지 않는다는 깨달음에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1년간 그림을 공부해 1922년 9월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법학도에서 미술학도로 전향한 것.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한 것이 1902년이었으니 20년 뒤 화가의 길에 접어든 도상봉은 서양화가 1세대의 핵심 작가가 된다. 그는 계몽적이고 교훈적인 고전주의와 아카데미즘 신봉자였다. 그러나 화풍이 잘 맞았음에도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조선미술대전 등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민족적 자의식이 탄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제도권 미술과 교류한 것은 해방 이후 1950년대의 일이다. 본인은 정제된 미학을 추구했지만 국전 심사위원으로서는 과감한 시도를 응원했고 류경채, 전혁림 등 상투적인 국전풍(風)에서 벗어난 작가들을 발굴했다.

도상봉의 결혼 뒷얘기도 흥미롭다. “평생의 반려자와 즐겁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예술에 대한 이해와 대화가 있어야 된다”며 정혼녀 나상윤 씨를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보내 서양화를 배우게 한 후 결혼한 일화에서 일본에 유학했던 ‘댄디한 모던보이’의 면모가 읽힌다. 1930년대에 신식 가정을 꾸미고 부인과 산책 다니는 이들 부부화가는 신문에 기사화될 정도로 특별했다.

무엇보다 “그림은 보는 이에게 쉽게 이해되어야 하며 즐거움과 명랑함과 평화로움을 주어야 한다”고 강조한 화가는 “회화는 생활의 반영”이라며 명륜동 집 근처의 성균관이나 고즈넉한 고궁도 즐겨 그렸다. 실력있는 거장은 대작 아닌 작은 그림에서도 실력이 드러난다. 1973년에 그린 ‘동해풍경’은 폭 30㎝의 소품이지만 수평선 너머까지 무한한 공간감을 느끼게 한다.

부유하듯 아련하고 오묘한 풍경그림으로 잘 알려진 화가 도윤희가 도상봉의 손녀다. 그는 도상봉 탄생100주년이던 2002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기념전 개막식 날에야 비로소 남 몰래 할아버지 화실을 들락인 비밀을 털어놓았다. “할아버지는 매일 일어나자마자 화실로 들어가셔서 오후3시쯤 나오셨는데, 화실엔 아무도 못 들어가게 하셨죠. 할아버지가 친구 만나러 잠깐 나가신 뒤 몰래 들어가 할아버지 그림을 보곤 했어요. 겨울에 난로도 잘 안 피우고 썰렁하던 그곳에 들어가면 물감 냄새 뒤섞인 화실의 묘한 냄새가 좋았어요. 사과가 캔버스 위에 옮겨간 듯 너무도 똑같은 그림에 놀라곤 했어요.” 그림 곁에서 가을이 무르익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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