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걷이도 다 끝나간다. 올해는 농사도 풍년이고 속속 전해오는 주요기업들의 3분기 실적발표 또한 어닝 서프라이즈 수준으로 풍년이다.
‘한국 사진계의 선구자’ 임응식(1912~2001)이 풍년 소식에 가을 추수 장면을 담고자 카메라를 들고 나선 것은 1977년의 일이다. 그간 쌀 부족을 이유로 막걸리 제조에 백미(白米)를 쓰지 못하게 하던 것이 이해 풍년을 계기로 허용됐으니 풍년도 대풍이었던 해다. 웅크린 털 짐승처럼 볏단들이 줄지어 쌓여 있다. 엇갈리게 묶인 모양이 마치 손에 손을 잡은 것처럼 정겹다. 고단함을 잊을 정도로 신 나게 벼를 수확했을 농부의 들뜬 마음이 규칙적으로 쌓인 볏단의 리듬감을 따라 전해진다. 보는 것만으로도 배부른 기분이 드는 이유는 볏단 너머로 아직도 수확해야 할 곡식이 수북하기 때문이다. 간결한 흑백사진 한 장 속에 시절의 만감이 깃들어 있다.
1912년 부산에서 태어난 임응식은 대대로 부유했던 집안에 4남 2녀 중 막내로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5살 때 형들과 함께 처음 형제사진을 찍었다. 대포같은 카메라 앞에서 몸이 자꾸만 휘청여 일본인 사진사 할아버지가 Y자 막대기로 뒷목을 잡아줬다. 당시는 초창기 사진이라 노출 시간이 길었고 아이들을 찍을라치면 이런 일은 허다했다. 움찔거린 추억이지만 임응식은 막연하게나마 정성으로 피사체를 다루는 태도를 기억에 새겼다. 그가 사진기를 처음 손에 쥔 것은 와세다 중학교에 입학하던 열네 살 때 일이다. 만주까지 누비며 사업을 한 큰형이 입학선물로 독일제 어린이용 카메라를 선물한 것이다. 박스 탱고르(Box Tengor)라는 카메라였다. 아마도 부산은 물론 전국에 그런 카메라를 가진 아이는 임응식뿐이었으리라. 어쩌면 가장 어린 나이에 사진을 찍어본 한국인이었을지도 모른다. 부산 구덕산에서 앙상한 가지만 남은 겨울 오동나무를 찍은 게 그의 첫 예술사진으로 알려져 있다. 임응식은 어렸지만 조리개와 셔터를 조절하는 법, 필름을 뽑고 현상·인화하는 법까지 꼼꼼하게 공부했다. 이것이 그의 인생은 물론 한국 사진계를 송두리째 바꿔놓을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임응식은 미술과 음악에도 재능있었지만 훗날 서양화가가 된 형(임응구)과 경쟁하기 싫어서, 새벽까지 바이올린만 켜는 것을 아내가 싫어해서 모두 그만두고 사진을 택했다. 1933년에는 일본인 중심으로 결성된 여광사진구락부에 가입해 사진 이론도 배웠다. 이듬해 일본의 월간 사진 잡지 ‘사진살롱’에 그의 작품 ‘초자의 정물’이 입선해 첫 출품작이 탄생했다. 하지만 일본 도시마체신학교에 진학하고 졸업해 가장으로서 우체국 직원이 되어 식솔을 돌보는 10여년 동안, 사진은 업이 아니라 취미였다. 해방 후 부산에서 등사업(일종의 인쇄업)을 시작했는데 사진으로 더 유명해 심지어 미군이 필름 현상을 해달라고 찾아오는 통에 결국 사진 현상소를 시작하게 됐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터졌다. 알고 지내던 미국 문화원장인 유진 크네즈가 종군 사진기자를 제안했다. 처음 체감한 전쟁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폭격으로 부서진 서울은…시신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너무 끔찍하고 소름이 끼쳐서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은 고사하고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래서 서울에 입성한 후 사흘간은 사진을 한 장도 찍을 수 없었다. 아름다운 대상만을 아름답게 찍어대던 나의 카메라 버릇을 사흘 동안 극복하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이었다.…그러나 나는 점점 예술사진가에서 기록사진가로 변해갔다. 역사의 현장을 기록해서 남기는 중차대한 임무가 주어졌다는 지각을 비로소 시작한 것이었다.”(임응식 회고록 중에서)
인천상륙작전 등을 촬영한 그의 사진은 ‘라이프’지에도 실렸으나 정작 본인은 미군에게 보낸 사진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어떤 것이 수록됐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전쟁을 계기로 사진의 ‘사실적 기록성’에 눈을 뜬 그는 이후로 ‘생활주의 사진’을 주창한다. 휴머니즘에 입각해 사회현실과 인간 생활을 꾸밈없이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 말이다.
1953년작 ‘구직(求職)’은 그런 임응식의 대표작 중 대표작으로 꼽힌다. 반세기 이전의 옛 사진이건만 높은 실업률, 특히 청년실업이 문제인 오늘날에 이 사진의 울림은 여전히 묵직하다. 실직자의 허망한 자세와 표정을 무척 가까운 거리에서 찍었다. 모자에 가려진 남자의 얼굴은 입 주위 표정만 보일 정도다. 직업을 구한다는 팻말을 목에 건 채 고개를 떨구고 벽에 기대 선 모습이 종전 직후 당시 상황을 엿보게 한다. 재건의 시대인데도 일할 곳이 없단 말인가. 사내의 뒤쪽으로 말쑥한 양복차림으로 인사 나누는 이들의 자신만만한 표정이 대조를 이룬다.
1960년대 지천명(知天命)에 이른 임응식은 우리 옛 건축물을 사진에 담기 시작한다. 본격적인 계기는 1966년 11월 건축 전문잡지 ‘공간’을 창간한 김수근(1931~1986)의 의뢰였다. 김수근은 한국의 자랑거리이자 문화유산인 전통건축에 대한 대중의 이해와 관심이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당시 한국 사진계의 대표 사진가로 알려진 임응식에게 촬영을 부탁했다. 작가는 촬영지 현장 조사 못지않게 도서관을 드나들었다. ‘건축을 얼마나 알겠나?’라며 비아냥거리던 건축계의 불신은 특유의 성실함으로 이겨냈다. 사라져 가는 전통문화를 사진을 통해 기록하겠다는 사진가로서의 소명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공간’지 창간호부터 1969년 5월호까지 ‘한국의 전통건축’ 사진을 연재했다. 종묘를 필두로 낙선재, 부석사, 해인사, 이조 상류주택, 경복궁, 칠궁, 비원, 금산사, 통도사, 실상사, 쌍계사, 선암사, 범어사 등이 차례로 선보였다.
1967년작 ‘와가군1’은 임응식이 한창 전통건축을 찾아다니던 1967년에 촬영한 것이다. 작가는 기와가 빼곡한 한옥 동네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포착했다. 화면에는 다양한 형태의 기와 지붕들만 한가득 담겼다. 이리저리 넘나드는 지붕 모양새가 꿈틀거리는 등뼈를 보는 듯하다. 시시콜콜한 한옥집살이 이야기는 빨랫줄에 걸린 옷가지 정도로 살짝 엿볼 따름이다. 획일적이지 않고 삐뚤빼뚤한 기와 지붕의 배치는 집 하나가 들어서고 마을이 생기기까지 세월의 더께를 재잘거리는 듯하다. 전통 기와를 세련된 추상화처럼 표현한 사진이지만 이 안에서는 서서히 옛것이 되기 시작한 한옥의 운명 또한 드러난다. 사진 왼쪽 위에 빼꼼한 공사용 철골이 이를 보여준다. 벌써 옆에는 양옥집이 자리를 잡았고, 새로 들어설 신식 집은 그보다 더 높게 적어도 3층 이상은 됨 직하다. 신문물에 압도될 한옥의 앞날을 암시하는 듯하다. 작가는 이 사진을 찍은 해로부터 꼭 10년 후, 또 다른 기와지붕을 찍어 ‘와가군2’라 제목 붙였다. 두 번째 와가군은 눈덮인 겨울날 찍었다. 기와의 먹색과 흰 눈 색이 대조를 이뤄 한옥 지붕의 아름다운 선(線)이 한층 잘 드러난다. ‘와가군2’는 ‘와가군1’보다 더 널찍이 많은 기와집들을 품고 있다. 여전히 남아있는 기와집들이 정겹고 고마워서였을까? 하지만 사진은 이토록 넓은 지역을 내려다 볼 수 있을 정도로 ‘더 높은’ 빌딩이 인근에 들어섰음을 방증한다.
또한 임응식은 문화사를 기록한다는 마음으로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사진에 담았다. 그는 뉴욕근대미술관이 기획한 국제 사진전인 ‘인간가족전’을 1957년 국내에 유치했고, 서울대를 비롯한 대학에서 사진학을 가르쳤으며, 국전에 사진부문을 포함시키는 일을 주도해 예술로서 사진의 위상을 끌어올렸다. 일찍 깨어 가장 높이 오른 새가 가장 멀리 내다봤던 것이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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