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공정거래위원회가 미국 반도체 기업 퀄컴의 라이선스 관행을 ‘특허권 갑질’로 보고 역대 최고 과징금과 시정명령을 내리자 통상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 문제가 한미 간 통상마찰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가 흘러나왔다. 실제 퀄컴은 물론 자국 기업의 특허권 보호에 민감한 미국 정부는 공정위 처분이 나오기 전부터 ‘공정위가 조사과정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하고 있다’며 무언의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공정위가 한미 FTA에 따라 미국 기업들에 보장된 방어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우회적이었던 압박은 지난 8월 제1차 한미 FTA 공동위원회 특별회기에서 미국 측이 ‘공정위의 방어권 침해’ 문제를 거론하면서 노골적으로 변했다. 한미 FTA 개정 여부를 두고 양국이 서로 탐색전을 펼쳤던 이 회의에서 미국 측이 공정위 관계자 참석을 요청하고 이 문제를 꺼낸 데에는 향후 개정 협상에서 쟁점화하기 위한 의도가 다분하다는 해석이 나온다.
당시 미국 측은 이 자리에서 우리나라 공정위가 한미 FTA 16.1조를 제대로 집행하지 않고 있다는 취지로 발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 FTA 협정문 16.1조는 경쟁법 집행에 관한 내용으로 행정 심리 과정에서 피심인의 진술 및 증거제출권, 상대방 증거에 대한 접근 및 반론권, 증인 등에 대한 교차신문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퀄컴과 미국 측은 특히 증거에 대한 접근 및 반론권을 문제 삼고 있다. 공정위가 심의 당시 사건의 이해관계자인 삼성전자로부터 제출받은 증거자료를 공개하지 않아 퀄컴의 방어권이 제약당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재판이나 심사 개시 전 원·피고 양측이 혐의 입증과 관련된 모든 증거자료를 공개하고 그 범위 내에서만 본안 심사를 하도록(‘디스커버리 제도’) 돼 있는데, 한국 공정위는 이런 입증 평등과 방어 기회를 보장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한미 간 법체계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주장이라는 것이 우리 정부와 경쟁법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우리나라는 디스커버리 제도가 없고 오히려 영업비밀보호제도가 있어 자료를 제출한 곳의 동의 없이 피심인에 자료를 제공하면 법 위반”이라며 “‘합리적 기회’에 대한 기준이 서로 다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정위는 조사·심의 과정에서 한국 법체계상 허용된 범위 내의 자료는 퀄컴에 모두 공개했고 반론권도 6차례 이상 주는 등 방어권을 충분히 보장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우리 정부도 그간 “경쟁법을 적용해 처리한 사례이기 때문에 통상관계와 연계시킬 이유는 없다”며 통상마찰로 번질 가능성을 꾸준히 차단해왔다. 여기에 퀄컴이 올해 1월 한국 공정위와 같은 혐의로 안방인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에 피소당하면서 한미 간 통상 분쟁화 가능성도 낮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처럼 상황이 바뀐 것은 보호무역주의를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출범이 결정적이었다는 게 중론이다. 지난 2년 간 물밑 압박만 해온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트럼프 행정부 출범 초인 올해 3월 ‘2017년도 연례 국가별 무역장벽 보고서’를 통해 처음으로 이를 공식 언급했다. USTR는 보고서에서 “많은 미국 기업이 한국 공정위 조사절차가 자신의 방어권을 제약하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며 “한국이 경쟁법 관련 한미 FTA의 의무를 완전히 이행하도록 보장하기 위한 양자회담이 앞으로도 예정돼 있다”고 밝혔다. USTR는 이미 퀄컴에 대한 공정위 처분이 나온 직후인 올 1월에도 연례 한미 FTA 공동위 회의에서 미국 기업들의 방어권 보장 문제를 산업통상자원부와 공정위에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안팎에서는 미국 측이 앞으로 한미 FTA 개정협상 과정에서 미국 기업들의 절차적 권리가 침해당하고 있다는 기존의 주장을 강하게 밀어붙이며 퀄컴에 대한 공정위 제재를 무효화 하려는 시도가 나올 수 있다고 경계하고 있다. 나아가 미국 측이 ‘디스커버리 제도’처럼 자국 기업에 유리한 제도의 국내 도입을 압박할 수도 있다. 전례도 있다. 공정위가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를 제재한 사건을 계기로 한미 FTA 체결 당시 미국 요구에 따라 2011년 공정위가 도입한 ‘동의의결제도’가 그것이다. 전직 공정위 고위관계자는 “미국 입장에선 통상 협상 중에 자국 기업에 유리한 제도 도입을 촉구할 수 있고 실제 미국은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일상적으로 이런 압박을 가하고 있다”며 “성공한 전례도 있기 때문에 이번에도 퀄컴 제재건을 계기로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등 우리 쪽에 제도 변화를 요구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전문가들은 퀄컴 사건에 대한 문제 제기와 제도적 개선 요구를 분리해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상승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피심인의 절차적 권리가 더 잘 보장되게 하자는 차원의 문제 제기라면 우리도 국익 관점에서 전향적으로 생각해야 할 문제”라면서도 “미국이 퀄컴 제재에 절차적 문제가 있었다며 제도적 개선을 연결시켜 요구하는 건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퀄컴 제재 등 개별 사건에 대해서는 기존 한미 FTA 규정상 공정위의 조사절차에 문제가 없었다는 점을 확실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빈난새기자 binther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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