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방한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우리 정부로부터 수십억달러어치의 무기 구매라는 선물을 챙겼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보름도 지나기 전인 21일(현지시간) 미국은 세탁기 50% 관세 카드를 꺼냈다. 둘 사이에 연결고리가 없다는 얘기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개정 협상을 앞두고 있는 미국이 각개격파식 통상전략을 내세우면서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무기는 무기대로 챙기면서 FTA와 통상분쟁에서는 또 다른 계산기를 들이밀고 있는 것이다.
당장 한미 FTA 재개정 협상은 수위와 폭이 더 확대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한미FTA 협상의 잣대가 되고 있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서도 최근 미국은 멕시코의 일몰조항 도입 합의와 최저임금 인상을 받아냈다. 일몰조항은 미국이 강하게 요구해왔던 것으로 5년마다 재협상을 벌여 협정을 연장하지 않으면 자동 파기됨을 뜻한다. 장근호 홍익대 통상학부 교수는 “NAFTA 협상 과정을 봤을 때 한미 FTA에서도 미국이 강하게 나올 것”이라며 “미국의 반응을 보면서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우리의 아킬레스건인 농산물을 협상의 지렛대로 쓸 것으로 보고 있다. 앞서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한미 FTA 재개정 협상에서) 농업은 레드라인”이라고 밝혔다. 추가 개방 시 농민의 피해가 크다는 이유다. 한미 FTA 발효 이후 한·육우 농가는 36.1%(7만3,050곳), 돼지는 32.8%(1,773곳), 낙농은 16.1%(714곳) 감소했다.
22일 서울 양재동 aT센터에서 열린 한미 FTA 개정 관련 농축산 업계 간담회에서도 이 같은 방침은 고수됐다.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정책국장은 “한미 FTA 폐기는 미국만 가진 옵션이 아니고 우리도 가진 옵션”이라며 “한미 FTA 틀 내에서 이익 균형을 갖추는 방향으로 충분히 해보겠지만 (미국이) 일방적이고 우리에게 불리한 주장만 할 때는 끌려가지 않겠다”고 했다. 간담회에 참석한 안병일 고려대 식품자원경제학과 교수는 “(미국산 수입품 증가로 인한) 소비자의 선호 변화까지 감안하면 농업 부문 피해가 더 클 수 있다”며 “미국이 농업까지 포함해서 추가 개방을 요구할 경우 우리는 농업 부문의 피해를 리밸런싱하자고 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농업 문제는 거꾸로 우리 협상단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있다. 북핵 문제로 한미동맹이 절실한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한미 FTA 폐기 카드를 우리가 꺼내기란 쉽지 않다. 북한에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감안하면 농업 개방을 막기 위해 다른 분야를 양보해야 한다. 현재 미국은 자동차 부품과 안전기준, 제약 등을 문제 삼고 있다. 미국은 반도체 기업 퀄컴에 대한 과징금도 테이블에 올렸다. 정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한미 FTA는 경제뿐 아니라 정치와 안보 측면의 의미가 크다”며 “이를 고려하면 우리 입장에서 재개정 협상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미국의 통상압력은 FTA 외에 다른 통상 분쟁 항목으로도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내년 초로 예정된 태양광 모듈 최종판정과 내년 4~5월께 나올 냉간압연강관, 폴리에틸린 테레프탈레이트 판정 결과 등도 우리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예상이다. 미 국제무역위원회(ITC)는 최근 삼성의 반도체 특허침해 사건 조사에 착수했을 정도로 통상압력을 높이고 있다.
/세종=김영필기자 김상훈·박형윤기자susopa@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