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진실한 모습을 찾아, 노동의 현실을 제대로 알고자 1980년대 초 강원도 태백 탄광으로 들어간 ‘광부 화가’ 황재형(65)이 동네 미용실에서 얻고 모은 머리카락으로 신작을 선보였다. 광부로 살고자 화구(畵具)도 챙겨가지 않은 태백 탄광에서 일찍이 석탄과 황토·백토를 개어 물감 대신 쓰면서 짭조름한 땀내와 질퍽한 흙맛 느껴지는 그림을 그려 노동의 생생한 현장을 ‘증언’한 그다. 사람의 머리카락을 부드러운 아교로 붙인 도발적 재료선택보다도 무엇으로 그렸건 한결같은 그 진정성이 더 놀라운 신작들이 오는 14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개막하는 개인전 ‘십만 개의 머리카락’에 걸렸다.
갱도 안에 간신히 다다른 가느다란 빛과 한겨울 새벽 길거리에 나와 일감을 기다리는 노동자의 시린 입김, 태백의 능선을 비추는 햇볕 등 황재형이 즐겨 그리던 소재들이 머리카락의 선묘(線描)로 그려졌건만 유화와 다름없는 생명력을 보여준다. 코와 입을 방진 마스크로 가리고 흰 두건이 새까매질 때까지 막장에서 일하고 나온 여자 광부를 그린 1996년작 ‘선탄부(選炭婦) 권씨’를 나란히 놓고 본다면 20여년 만에 그린 ‘드러난 얼굴’에서는 변함없는 눈동자의 생명력이 반갑고 숨통 트인 얼굴에서 안도감이 느껴진다. 늙어가는 광부의 패인 주름을 따라 연필로 그은 듯 어지러이 머리카락이 놓였다. 살아있음 자체가 감격스러운 듯 인물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새카만 머리칼로 눈동자를 채우고 조금 옅은 갈색 머리카락으로 촉촉한 눈 주변을 그렸다.
작가는 머리카락을 재료로 택한 이유에 대해 “머리카락은 인간 최초이자 최후의 옷”이라며 “머리카락은 말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어찌 먹고 어떤 역사를 갖는지 모조리 기록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10년 전쯤, 태백의 한 광부네가 이사 가며 남겨둔 깨진 거울이 자극제가 됐다. 거울 깨진 자리에 집주인의 소녀 시절 사진이 끼워진 것을 보고 가슴을 쿵 얻어맞았다. “일반 사람들도 이런 예술을 삶 속에 품고 살더라”고 입을 뗀 작가는 “우리 안의 순수한 심성, 진정한 인간정신을 찾고 싶어서 택한 이 수만 개의 머리카락에는 지나간 추억과 살아가는 경험, 자신의 열망, 소중히 여기는 미래에 대한 꿈이 가득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10만 개에 이른다는 사람의 머리칼이지만 한날한시에 태어나는 머리칼도 없고, 한꺼번에 다 빠지는 탈모도 없습니다. 그토록 평등을 이야기하면서도 불평등이 체화된 인간의 몸뚱이에서 이처럼 평등한 머리카락이 태어났죠. 왜 인간은 자기가 소유한 머리카락처럼 살지 못하나요? 그런 머리카락이 우리네 현실을 가장 강력하게 보여주는 징표이자 귀히 여길 수밖에 없는 선물입니다.”
황재형은 중앙대 회화과를 졸업한 후 1982년 이종구·송창 등과 조직한 ‘임술년(壬戌年)’의 창립동인으로 모순된 사회현실에 저항하는 ‘민중 미술’ 운동의 핵심작가로, 실천주의 예술가로 살아왔다. “사랑 노래마저 금지곡이 되고 온갖 책들이 금서가 되던 시절 인간의 진실을 보기 위해 탄광으로 들어간” 그는 광부 남편을 잃고 생계를 짊어진 선탄부 아낙들의 목욕장면을 훔쳐보려다 “건강한 몸으로 가족을 지키는 그 현장, 그 몸의 아름다움을 증거하고 싶었지만 이런 장면까지 팔아서 그림을 그려야겠는가 고민 끝에 문 앞에서 울며 포기한 자신의 일화를 털어놓으며 “타인의 불행으로 나의 행복을 구축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됐고 십 수년째 삭혀지지 않은 그 부끄러움은 타인의 존재감이고 생명력인 머리카락을 통해 지워지게 됐다”고 고백했다.
맘먹은 대로 그릴 수 있는 물감 그림과 달리 머리카락 그림은 3배 이상의 공이 들고 눈의 실핏줄이 터질 정도로 고된 작업이라고 했다. 제각각인 머리칼 색깔이 그림의 색조를 풍성하게 하지만 흰 머리를 구하는 게 제일 어렵다고 한다. “개인 감성으로 그린 유화와 달리 나를 타자화한 머리카락 그림은 내가 아닌 우리가, 익명의 개개인에게 보내는 뜨거운 연서입니다. 건강하고 기쁘게 사는 사람이 모발도 건강하고, 회의적인 사람은 머리카락이 아니라 터럭이더라고요. 자기 긍정을 갖고 열심히 사세요, 머리카락에도 힘이 생깁니다.”
작가는 중절모를 벗어 자신의 민머리를 슬쩍 보이며 호탕하게 웃었다. 전시는 다음달 28일까지.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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