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다이슨 James Dyson은 먼지로 가득 찬 구식 진공청소기 봉투와 흡입력 저하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에 대한 해결책은 먼지 봉투 없는 청소기였다. 이런 아이디어는 공기정화기와 핸드 드라이어, 조명, 헤어드라이어, 청소기 등을 통해 연간 30억 달러를 벌어들이는 대기업의 기초가 되었다.
아홉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청소기 먼지 봉투를 교체하고, 청소기가 미처 빨아들이지 못한 것들을 줍는 일이 너무나 싫었다. 30년이 지난 1979년, 나는 아내 디어드리 Deirdre를 도와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소기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나는 갈아 끼울 봉투를 찾지 못해 먼지 봉투를 비워야 했다. 청소기 사용법을 한 평생 증오했던 나는 그때 봉투 없는 진공청소기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엔지니어와 디자이너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기계의 작동 원리에 관해 정말 관심이 많다. 볼배로 Ballbarrow *역주: 손수레에 바퀴 대신 공을 달아 움직임을 더 수월하게 만든 다이슨의 1974년 발명품 를 만들었을 당시에도 나는 바퀴 대신 큰 빨강색 공을 사용했다. 그 때도 손수레에 투자한 사람들은 있었지만, 그들은 진공청소기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독자적으로 사업에 착수했다.
1979년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나는 사이클론 Cyclone *역주: 청소기로 흡입된 먼지와 공기를 분리해내는 기술 을 개발하는데 몰두했다. 부채가 점점 쌓이고 있었다. 그때 고맙게도 아내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무언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파산이 두렵지는 않았지만, 살 집을 잃어버리는 건 두려웠다. 아내는 그림들을 팔았고, 미술 수업에 나가기도 했다. 우리는 계속 돈을 빌리고 또 빌렸다. 직접 채소도 재배해 먹었다. 아내가 아이들의 옷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
나는 언제나 기업가였지만, 단 한번도 진공청소기로 사업을 시작하리라곤 생각 하지 못했다. 제품 자체에 열정이 있었을 뿐이었다. 1980년대 초반, 나는 내 기술로 라이선스 계약을 따내는 시도를 했다.
현재는 경쟁자가 된 기업들을 만나기 위해, 수많은 시간과 돈을 낭비해야 했다. 콘에어 Conair와 블랙 앤드 데커 Black & Decker 같은 몇몇 회사들은 기계를 라이선싱할 때 꽤나 깐깐하게 굴었다. 논의가 길어져 사내 특허 변호인까지 만나야 했다. 그는 결국 계약을 막았다. 몇몇 경우엔 기업들이 상품 라인을 다변화하지 않기로 결정해 논의 자체가 중단되기도 했다. 그들에겐 라이선스를 거절 할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단지 기술적인 발전에 관심이 없다고만 말했다. 그들은 내가 계속 전진해야 할 용기를 주었다.
우리는 1986년 돌파구를 찾았다. 일본 중소기업 에이펙스Apex와의 라이선스 계약에 성공해 약간의 수입이 생겼다. 그러나 에이펙스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들은 그 기계를 지포스 GForce라는 틈새 상품으로 대당 25만 엔에 팔았다. 당시 환율로 2,000달러 정도 가격이었다.
1990년대 초반, 나는 스스로 기계를 개발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라이선스 계약을 논의했던 기업들이 곧바로 내 기계와 비슷한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대서양을 오가며, 내 진공청소기의 특허권을 보호하기 위해 법적 싸움을 벌였다. 결국엔 합의로 마무리 됐다(1991년 다이슨과 암웨이 Amway는 특허권 침해 소송에서 합의를 봤다. 암웨이 측은 계속 자사 제품을 판매했고, 두 당사자는 공동 라이선스를 소유하게 됐다).
그 어떤 벤처자본가나 은행도 자금을 대주지 않았다. 하지만1993년 내 은행 담당직원 마이크 페이지 Mike Page가 로이드 뱅크에 개인적으로 로비를 진행해 장비에 필요한 돈을 빌릴 수 있었다. 은행이 100만 달러를 대출해 준 덕분에 제품 생산에 나설 수 있었다. 나는 우리 제품을 구매하겠다는 우편 카탈로그를 하나 받았고, 그 외 또 다른 우편도 하나 받았다. 영국 백화점 존 루이스 John Lewis가 우리 제품을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후 나는 더 많은 유통업체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2년 만에 다이슨 청소기가 영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청소기로 부상할 수 있었다.
영국에서 일단 자리를 잡자 다른 나라에서 유통업체를 확보하는 일이 수월해졌다. 하지만 영국에서 잘 팔린다는 건 미국이나 독일 소비자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국가마다 생각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유명 브랜드들이 잘 팔린다는 건 새삼 놀라운 사실이 아니었다. 소비자들은 알려진 브랜드를 신뢰할 수밖에 없다. 새 브랜드를 접하면 사람들은 의구심을 갖게 된다. 하지만 리스크를 함께 짊어질 누군가는 있게 마련이다.
2002년 미국의 첫 고객으로 베스트바이Best Buy 였다. 한 바이어가 우리 진공청소기를 집에서 2주간 사용한 후, 그녀의 상사에게 정말 좋은 제품이라고 보고했다. 그 후로 다른 유통업체들도 다이슨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미국 시장은 다이슨의 성공을 빠르게 직감했다.
미국에 제품을 출시하기 위해 우리는 내 집에서 TV 광고를 촬영했다. 나는 진공 청소기를 들고, 어떻게 기술이 작동하는지 설명했다. 다이슨 청소기는 초창기부터 유명 애호가들이 사용했다. 인기드라마 프렌즈 Friends 의 배우 코트니 콕스 Courteney Cox가 대표적이었다. 우리 제품은 프렌즈에 몇 번 등장하기도 했다.
우리는 현재 진출해 있는 시장을 미리 계획 하지 않았다. 논리적인 경영 계획을 따르는 건 내겐 따분한 일이었다. 대신 우리는 신기술을 개발하고 뭔가 다른 기술의 제품을 만드는데 주력했다. 지난 2006년 우리는 종이 타월보다 환경에 더 이로운 첫 핸드 드라이어를 출시했다. 그 이후엔 날개 없는 선풍기 에어 멀티플라이어 Air Multiplier를 선보였다. 몇 년 간 세탁시간을 단축해주는 세탁기를 만들려고 노력하기도 했지만, 돈을 벌지 못해 중단했다.
내 철학은 일단 판매를 하면, 해당 제품에 대해 계속 책임을 지는 것이다. 우리는 업계 최초로 5년 보증기간을 제공했지만, 그건 단순히 마케팅 목적만은 아니다. 누군가가 제품을 사용하는데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다이슨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누군가 다이슨 청소기를 구매하는데 400~500달러를 썼다면, 그들은 투자한 것에 대해 만족을 느껴야 한다.
결론적으로 나는 많은 거절을 당하고 누군가가 내 아이디어를 노골적으로 탈취하는 것을 경험한 덕분에,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었다. 우리는 불황도 비켜갔다. 사람들은 앞으로도 계속 집을 청소해야 한다. 그러려면 오랫동안 쓸 수 있는 제품을 구매해야 한다. 그 결과 상대적으로 값비싼 청소기가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 다이슨이 들려주는 최고의 조언
제품이 왕이다.
어떤 제품이든 사내의 모든 사람들이 그 제품을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 직원은 모두 출근 첫날 진공청소기를 만들고 있다. 직원이 고객 서비스 담당이라도 예외는 없다.
메모를 금지하라.
사람들이 메모와 이메일에 목을 매느라 서로 대화를 하지 않는다. 직장에서 서로 마주치고 불꽃 튀기는 논쟁을 할 때 진정한 가치가 창출된다. 바로 창조적인 것들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메일을 싫어하는 기업문화는 그 회사가 건강하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경청하라.
모든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고, 존중 받는 열린 환경을 만들어라. 어리석은 제안을 나무라지 않아야 비로소 위대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위대한 아이디어는 대부분 어리석은 제안이나 잘못된 제안에서 탄생했다.
서울경제 포춘코리아 편집부 / Interview by Dinah E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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