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위주의 보수적인 기업문화가 강한 제약업계에도 ‘여풍(女風)’이 거세지고 있다. 지금까지는 내수 영업 위주로 성장하면서 여성 직원이 많지 않았지만 신약 개발과 해외 시장 진출이 활기를 띄면서 연구개발(R&D)과 마케팅·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강점을 지닌 여성들의 고위직 진출이 느는 추세다. 제약업계의 여성 임원 비중이 아직 10%에 못미치지만 최근 들어 여성 임원이 증가하면서 ‘유리천장’이 허물어지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1일 업계에 따르면 한미약품은 지난 달 29일자로 창업주 임성기 회장의 장녀 임주현 전무를 부사장으로 승진 발령했다. 임 부사장은 임 회장의 2남 1녀 중 둘째로 2007년부터 한미약품의 인적자원개발(HRD) 업무와 글로벌 전략 업무 등을 담당해왔다. 장남과 차남인 임종윤 사장과 임종훈 부사장이 각각 한미사이언스나 한미벤처스 등 주요 계열사 대표이사직을 겸직하는 것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눈에 덜 띈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인사와 글로벌 전략과 같은 핵심업무를 맡아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한미약품은 아울러 이번 인사에서 박명희 마케팅사업부 상무를 전무로, 차미영 해외BD 이사대우를 이사로 승진시켰다. 한미약품의 여성 임원 비율은 약 27%로 국내 제약사 가운데 최고 수준이다.
앞서 JW그룹은 지난해 12월 초 단행한 인사에서 JW바이오사이언스 대표이사에 함은경 부사장을 내정하며 그룹 첫 여성 최고경영자(CEO)를 탄생시켰다. JW중외제약·JW홀딩스·JW생명과학 등 그룹 주요 계열사의 주요 보직을 역임해가며 30년 가까이 근무해온 함 부사장은 합리적이고 소통을 중시한다는 긍정적인 내부 평가를 바탕으로 제약업계의 유리 천장을 깼다. JW그룹은 이번 인사에서 나숙희 JW홀딩스 수석상무와 김진숙 JW중외제약 수석상무 등 2명의 여성 고위 임원도 배출했다.
한발 앞서 고위직에 진출했던 여성 인사들의 활약도 눈에 띄는 상황이다. 국내 제약업계 첫 여성 CEO인 김은선 보령제약 회장은 회사의 고혈압 신약 ‘카나브’의 글로벌 성공을 이끈 인물로 주목받고 있으며 동화약품의 윤현경 상무도 커뮤니케이션 실장으로 활약하며 120년 최장수 제약사의 브랜드 이미지에 젊음을 불어넣었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1일자로 이사에서 상무로 승진한 삼진제약의 최지현 홍보실장 역시 마케팅과 홍보 업무를 꾸준히 담당하며 두각을 나타낸 바 있다. 김은선 회장과 윤현경 상무, 최 상무는 모두 오너가 출신이다.
여풍이 더욱 거세게 부는 곳은 다국적 제약사다. 한국글로벌의약산업협회에 따르면 40곳의 회원사 가운데 여성 CEO가 이끌고 있는 곳은 9곳에 이르며 이중 6명이 한국인이다. 특히 최근에는 한국 시장에서 발휘한 리더십을 인정받아 아시아태평양 등 글로벌 사업부로 진출하는 사례도 크게 늘었다.
일례로 필러·보톡스 등으로 유명한 글로벌제약사 엘러간은 지난해 12월 김은영 한국엘러간 사장을 대만·태국·홍콩 등 아시아 9개국의 총괄대표로 승진하는 인사를 단행했다. 1992년 한국얀센을 시작으로 말레이시아, 중국 등 아시아 곳곳에서 탁월한 성과를 창출해온 김옥연 한국얀센 사장 역시 능력을 인정받아 지난해 12월 1일자로 아시아태평양 사업 전략 및 마켓엑세스 담당 부회장으로 임명됐으며 김선아 한국화이자제약 에센셜헬스(PEH) 사업부문 대표도 비즈니스 성과와 역량을 인정받아 올해부터 일본 PEH 사업부문 총괄로 영전했다.
남성 위주의 보수적인 기업 문화가 강한 탓에 국내 60대 상장 제약사 중 여성 임원의 비율은 아직 10%가 채 안되고 그마저도 대다수가 오너 일가에 국한되는 등 한계많다. 하지만 신약개발과 해외 진출에 국내외 제약기업의 역량이 집중되는 상황에서 여성의 고위직 진출은 가속화하리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R&D와 글로벌 마케팅 분야를 중심으로 여성 임직원들이 꾸준히 늘고 있는 상황”이라며 “앞으로도 능력주의에 따른 여성 인사 발탁은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경미기자 kmki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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