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기대하는 국민연금의 역할 모델이 기업 개혁을 넘어 시장 성장으로 확대되고 있다. 운용자산이 오는 2025년 1,000조원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되는 국민연금의 성장은 분명 한국 경제의 큰 자산이지만 자칫 국민연금 만능주의로 엇나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1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12월27일 발표한 2018년 경제정책방향에서 기획재정부는 코스닥 시장과 기술금융 활성화 등을 문재인 정부의 성장 정책인 ‘혁신 성장’을 위한 주요 과제로 내세웠다. 그 방안으로 코스피와 코스닥을 혼합한 벤치마크 지수 변경, 코스닥 투자형 위탁운용 유형 신설 등 연기금 ‘유인책’을 마련했다. 또 주식 5% 이상 보유 목적을 ‘단순투자’로 공시한 뒤 적극적인 주주활동을 펼쳐도 경영 참여로 간주하지 않고 투자 기업의 외부감사인 신청권 부여를 검토하는 등 국민연금의 권한 범위를 넓히는 ‘당근’을 포함시켰다. ★본지 2017년 12월20일자 19면, 27일자 4면 참조
금융투자 업계는 이를 두고 정부가 국민연금 활용을 위한 적극적인 대응에 나섰다는 반응이다. 여타 기관투자가에 비해 자산 규모는 월등히 크지만 코스닥 투자 비중은 2.2%(지난해 상반기 기준)에 그치는 만큼 국민연금이 나서야 정책 효과가 커진다는 판단이다. 다른 연기금은 5% 이상, 공제회의 경우 10%를 훌쩍 넘게 코스닥에 이미 투자하고 있다. 특히 연기금의 코스닥 투자 확대를 혁신 기업 생태계 조성의 디딤돌로 꼽으면서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정책 참여를 경제 성장 정책의 일환으로 삼았다. ‘코스닥 중심의 자본시장’은 지난해 11월 기재부와 금융위원회·중소벤처기업부가 주축이 돼 발표한 혁신창업 생태계 조성 방안에서도 비중 있게 다룬 바 있다. 결국 이미 수탁자책임원칙(스튜어드십 코드)을 통한 기업 지배구조 감시와 대주주 전횡을 막는 시장 감시자로 국민연금이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시장 성장에도 한몫하라’는 또 다른 임무를 부여받은 셈이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순서가 뒤바뀌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민연금에 산적한 문제점을 개선하지 못한 상태에서 역할만 확대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국내 연기금의 한 고위 관계자는 “운용 규모가 큰 국민연금을 우대하는 것 같지만 외국 금융투자사들 사이에서는 세계 3위 규모의 ‘덩치’만큼 운용 능력이 따라주지 못한다는 인식이 팽배하다”며 “국민연금의 지배구조가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는데 국민연금이 기업의 지배구조를 어떻게 개혁할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국민연금의 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본부는 보건복지부 산하 기관이며 복지부 장관이 기금운용위원장을 맡는다. 복지부 장관과 국민연금 이사장을 지내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최광 전 장관은 최근 국회 토론회에서 “(기금운용과 관련한) 전문성 확보가 급선무”라고 꼬집기도 했다.
국민연금이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를 해본 경험이 사실상 전무하다시피 한 것도 문제다. 송홍선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미국 등 선진국의 연기금은 이르면 지난 1980년대부터 다양한 형태의 의결권 행사를 경험했지만 우리나라는 어떤 기관투자가도, 심지어 국민연금조차 주주권 수단을 행사해보지 못했다”며 “외국 연기금들과 연대해 주주 관여 정책에 관한 구체적인 경험과 전략과 경험을 공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계 최대 연금인 일본 공적연금(GPIF)은 민간운용사에 투자와 투표권까지 포괄적으로 위탁하지만 국민연금은 투표권을 직접 행사하게 돼 있다. 한 번도 검증된 적 없는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에 시작부터 너무 많은 권한을 준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조양준기자 mryesandn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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