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인 조선 중기로 떠나보자. 불과 5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왜란과 호란을 각각 두 차례씩 겪은 조선의 참혹함은 훗날 제국주의의 침탈과 동족상잔으로 얼룩진 근현대사의 전조(前兆)였다.
전시에 군사와 행정을 총괄하는 도체찰사로서 임진왜란을 치른 서애 류성룡은 위기 극복의 자세와 정신을 담은 성찰의 저술 ‘징비록(懲毖錄)’을 집필했다. 지난 잘못을 반성해 닥쳐올 우환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징비록’은 훗날 일본판 ‘조선징비록’으로 간행되기도 했는데 그 서문에는 “도요토미 가(家)는 전쟁을 너무 좋아했기에 망했고, 조선은 전쟁을 잊었기에 망할 뻔했다”고 쓰여 있다.
전쟁은 당대의 사회와 제도·국력을 반영한 총체적 산물이다. 어떤 전쟁이든 정치체제·무기체계·신뢰 중 어느 하나라도 갖추면 적어도 패배하지 않는다. 정묘년과 병자년의 호란에는 이 세 가지가 모두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광해군의 정책을 모두 뒤엎고 조정을 서인으로 채웠다. 중신들은 반정의 논공행상을 따지고 명(明)과 청(淸) 사이에서 명분을 놓고 줄타기만 할 뿐이었다.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했으며 결국 외세의 침입을 불러오기에 이른다.
무기체계와 혁신은 어떠했는가. 포르투갈 상인들로부터 조총을 구입한 일본은 임진왜란 이후 제작 기술력을 높여 수출국으로 발돋움했다. 명나라가 네덜란드에서 구입한 홍이포(紅夷砲)는 청으로 이전돼 조선의 성벽을 무너뜨렸다. 조선군도 조총으로 무장했지만 훈련과 관리 측면에서 청에 대적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는 후세의 평가다. 조선군 4만명이 청의 기병 300기에 패퇴한 쌍령전투는 우리 역사의 3대 패전으로 남았다.
정치체제·무기체계와 함께 신뢰마저 무너졌다. 민심이 이반되고 군의 사기도 떨어졌다. 왜란 이후 실정에 대한 성찰도, 민심을 다스리려는 노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서 전략의 여섯 가지 성공 요인 중 하나로 ‘백성의 협조’를 꼽았다. 충무공 또한 “전투는 군사가 하지만, 전쟁은 백성이 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온몸으로 설파했다. 적진 옆에서 한 달간의 대장정을 통해 아군을 복원하고 민심을 수습한 비장함은 깊은 울림을 준다. 이른바 ‘무신불립(無信不立)’이다.
왜란 때는 충무공의 애민정신과 게임 체인저(game changer)인 거북선의 혁신이 있었으나, 호란 때는 화전(和戰)을 놓고 정쟁과 명분론만 가득했다. 왜란 때는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지만 백성의 마음이 떠난 호란 때는 의병조차 없었음이 허허롭다. 김훈 작가의 ‘남한산성’에는 47일간 생사를 오갔던 민초들의 처절함이 핏빛으로 묻어난다.
청이 한파를 가르고 파죽지세로 침략해온 길. 6·25전쟁 때는 북한의 남침로였고 이어서 중공군이 개입했던 얼룩진 험로가 다름 아닌 지금의 통일로임을 되새기는 겨울이다.
임기철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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