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무가내 식 제재로 이미 그로기 상태인데 추가로 두들겨 맞는다면 아예 수출을 하지 말라는 얘기나 다름없습니다.”
지난해 12월 정부가 미국의 통상공세에 맞대응하기 위해 철강업계 임원들을 소집한 자리. 이날 회의에 참석한 한 철강업계 고위 임원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정부가 미국이 초고강도 제재인 무역확장법 232조를 발동하는 쪽으로 기울었다는 암울한 소식을 전해왔기 때문이다. 그는 “정부가 상황이 많이 안 좋다며 수출 목표치를 더 낮춰 잡으라고까지 하더라”며 “어디까지 떨어져야 끝나는 게임인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무역확장법 232조 발동 이전부터 한국 철강업체는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포스코 등이 지난 2016년 열연강판에 60%대의 관세를 맞으면서 대미 수출량이 급감했다. 대미 열연수출은 2014년 10억달러, 154만톤을 수출했지만 지난해 각각 2억7,500만달러, 45만톤까지 쪼그라든 상태다.
피해는 열연에만 그치지 않는다. 미국은 포스코산 열연을 썼다는 이유로 다른 철강업체 제품에도 무차별적으로 덤핑 낙인을 찍었다. 이 때문에 한국 철강업체의 미국 수출은 2014년 57억5,000만달러(591만톤)에서 지난해 36억9,000만달러(372만톤)로 35% 가까이 급감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결국 232조를 발동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업계가 참담해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업계는 이미 고율의 관세로 경쟁력을 상실한 가운데 25%의 추가 관세가 매겨지면 미국 시장에서 완전히 경쟁력을 잃는다고 보고 있다. 당장 경쟁업체인 미국 기업에 가격 경쟁력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최종 판정에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나프타)으로 얽혀 있는 캐나다와 멕시코는 관세부과 대상에서 제외될 가능성도 제기되는 상황이다. 대미 수출 1·4위에 올라 있는 두 나라마저 통상압력에서 벗어나면 한국이 미국 시장에서 짊어져야 하는 부담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게리 콘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처럼 자유무역을 중시하는 인사들은 미국이 구축한 자유무역체제가 훼손될까 우려하고 있다”며 “나프타로 얽혀 있는 국가가 제재 대상에서 빠지면 한국 철강업체만 ‘독박’ 쓰는 꼴”이라고 말했다.
실제 232조가 발동되면 그나마 미국 시장에서 선방하던 강관제품도 열연 등 다른 철강재의 전철을 따를 것으로 보인다. 강관업체들은 지난해부터 국제유가가 회복될 조짐을 보이면서 미국 셰일오일 개발 사업이 활발해져 수출량을 늘려왔다. 한국철강협회는 2015년 연 110만톤 수준이던 강관 수출량이 지난해 200만톤을 넘어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번 25%의 관세가 추가 부과되면 치명상을 입을 것으로 전망된다. 유정용 강관은 현재 수출가격이 톤당 1,100달러(약 120만원) 수준이다. 25%의 관세가 더해지면 관세율이 세아제강의 경우 30%, 넥스틸은 70%까지 뛴다. 120만원 수준이던 유정용 강관의 수출가격이 최대 200만원을 넘게 되면서 가격 경쟁력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당분간 미국 수출을 포기해야 한다는 암울한 전망이 흘러나오는 이유다. 지난해만 1조8,000억원 이상을 수출했던 대미 강관 시장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세아제강은 대미 수출로 확보한 매출의 20%(약 4,600억원)를 통째로 날릴 판이다. 휴스틸 역시 매출의 60%를 수출로 거두고 있는데 이중 미국 비중이 70%(약 2,900억원)를 넘는다. 원재료를 공급해온 포스코 등도 유탄을 피할 수 없다. 세아제강만 하더라도 열연 92%를 포스코 제품에 의지하는 실정이다.
더욱이 산업계에서는 미국의 광기 어린 보호무역의 파장이 이제 시작이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철강 제재에 한국이 들어갔지만 어디까지나 미국의 제1 타깃은 중국이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미국은 4월 지식재산권 침해 문제와 10월 환율조작국 보고서를 통해 중국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일 것으로 보인다. 무역전쟁으로 중국의 대미 수출이 줄어들면 한국의 대중 수출도 줄어든다. 우리나라 대중 수출의 76%(2015년 기준)가 중간재다. 가뜩이나 사드 보복 이후 우리 주력산업들은 중국에서 영향력이 약해지고 있다. 여기에 미중의 무역 힘겨루기가 격해지면 철강에 이어 다른 주력 산업들도 타격을 받는 것이다. /김우보·김상훈기자 ub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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