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미국은 파상공세를 펼쳤다. 그해 10월15일 닉슨은 “섬유협정이 체결되지 않으면 일방적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결국 우리 정부는 △5년 동안 합성섬유류의 평균 대미 수출 증가율 7.5% 이하로 제한 △5%까지의 이월거래 허용 등을 미국과 합의했다.
미국의 속내는 어땠을까. 1978년 한국 정부의 대미 로비사건을 다룬 미국 하원의 ‘프레이저보고서’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남한은 자국의 경제 잠재력을 제한하려는 시도이자 오랫동안 유지돼온 특별한 관계를 깨려는 사건으로 봤던 반면 미국은 그것을 수십년 동안 지원해왔던 우방에 대한 최초의 요구로 봤다.”
한국 경제에 치명타가 될 수 있는 일에도 미국은 이를 당연시했다는 얘기다. 47년 전의 일이지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폐기를 들먹이고 우리나라의 세탁기와 태양광에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를 취하려는 도널드 트럼프 정부와 닮아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6·25 때 도왔으니 이제는 한국이 갚아야 한다”고 했다. 경제이익 앞에서는 언제든 동맹도 내팽개치는 게 미국의 민낯이다.
보고서를 보면 트럼프가 무역전쟁을 벌이는 이유를 추정해볼 수 있다. 보고서는 “1971년 봄 기간에 동아시아에서의 섬유류 수입이 극적으로 증가하자 정치적 반향이 커졌다”며 “1972년 선거가 다가옴에 따라 섬유류 수입제한은 닉슨 대통령의 ‘남부전략’의 핵심요소가 됐다. 남부의 섬유류 생산자들이 가장 강력한 수입제한 지지자들이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트럼프도 처지가 비슷하다. 오는 11월 선거를 앞두고 5월까지는 백인 노동자층의 지지를 이끌어내야만 한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6일 “트럼프가 11월 선거를 의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교훈은 또 있다. 4개국 협상 때 우리는 버티기 전략을 택했다. “당당하게 협상에 임하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와 비슷하다.
그러나 현실은 참혹했다. 미일 협정 타결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한국 정부는 부랴부랴 일본에 대표단을 보내 협상을 했다. 보고서는 “쿼터협정에 참여했던 4개국 중 한국이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고 평가했다. 또 “한국 정부는 강하게 버티면 미국이 협상을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비현실적인 기대가 있었다”며 “한국인들은 엄청나게 거대한 압력이 가해질 때까지 조금도 움직이려고 하지 않다가 갑자기 무너졌다”고 해석했다.
신제윤 전 금융위원장은 트럼프를 두고 “닉슨 때와 너무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미국 역사를 놓고 보면 트럼프가 이상한 것만은 아니며 이를 간과하면 무역전쟁에서 우리만 패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세종=김영필기자 susopa@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