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강남 테헤란로는 본격 개발 궤도에 올랐다. 당시 한국무역센터 건물은 국내 몇 안 되는 고층 건물이었다. 1990년대 들어 포스코 등 대기업은 물론 금융기업 본점이 속속 테헤란로에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의 강남 테헤란로는 1차 벤처 붐으로 요동쳤다. 이 같은 변화무쌍함이 깃든 당시의 강남은 ‘가짜 개발’로 소위 한몫 건지려는 사기꾼들에게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릴 수 있는 먹잇감이 즐비한 터전이었다. 내로라하는 사기꾼들의 타깃이 된 이들 중 하나는 은행원들이었다. 당시 강남 곳곳에 신설 지점이 들어서며 고객 유치를 둘러싼 은행 간 경쟁도 치열했다. 고액 자산가를 유치, 각종 대출 등을 통해 실적을 늘려야 했던 신출내기 지점장 중 일부는 강남을 무대로 날뛰던 이들의 ‘사기 대출’에 속아 넘어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소위 ‘꾼’들이 주름잡던 이때 박종복(63) SC제일은행장도 이곳에서 영업맨으로 뛰고 있었다. 당시 36세의 과장이던 박 행장은 입행 후 일곱 번째 발령지로 서울 테헤란로 지점 개설 준비팀에 배치됐다. 지점 개설 후 대형 금융사기 사건에 휘말릴 뻔한 일도 이 무렵 겪었다. 벤츠 승용차를 타고 내린 옷매무새 단정한 신사가 대출 상담을 하고 싶다며 사무실로 그를 이끌었다. 내로라 하는 유명인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고 겉으로 풍기는 이미지 자체로만 봤을 때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직감했다. 이 신사는 자리에 앉자마자 자신의 부동산 개발 사업의 장밋빛 미래를 휘황찬란한 언사로 쏟아냈다. 박 과장은 한참을 그와 함께한 뒤 지점으로 돌아와 지점장에게 “거래를 거절해야겠다”고 보고했다. 지점 개설 초기라 실적을 늘려야 하는 상황에서 이 같은 호재를 그냥 버리는 게 마냥 못마땅한 상사도 있었지만 당시 박 과장은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다. 100% 사기”라며 완강히 거래 거부 의사를 고수했다. 며칠 뒤 뉴스를 보던 박 과장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대형 부동산 사기 사건 당사자로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한 그는 얼마 전 ‘벤츠 탄 신사’였기 때문이다. 남다른 그의 ‘촉’과 소신 있는 업무보고가 큰 위기를 모면하는 힘으로 작용한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박 행장은 1979년 제일은행에 입행해 20여년을 일선 지점에서 보냈다. 당시 대학을 졸업한 은행원으로선 드문 경력이었다. 은행원 90%가 고졸자였던 탓에 대졸자는 영업점 근무 후 바로 본점으로 발령 났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그는 서울 명동에 있던 중앙지점에서 초임 근무를 시작한 이래 종로·장사동·테헤란로·광화문지점 등 10여개 지점을 누볐다. 현장 영업에 누구보다 도통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후에는 PB강남지역본부장·영업본부장·소매채널사업본부장 등을 거쳐 ‘내공 있는 영업통’으로 성장했다.
같이 입행한 동기들이 본부로 들어가 활약할 때 지점을 맴돌고 있는 자신에게 회의가 들 때도 있었다고 한다. 19일 서울경제신문과 만난 박 행장은 “우직하게 20여년을 지점을 돌다가 문득 ‘혼자 변방으로 밀려나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도 된 게 사실”이라며 “그러나 20년 넘게 현장에서 쌓은 영업 경험이 결국 행장까지 오를 수 있게 한 날개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스탠다드차타드(SC)은행에 ‘제일’이라는 옛 명칭을 부활시킨 주인공이다. SC은행은 2005년 제일은행을 인수한 뒤 2012년 1월 ‘제일은행’을 빼고 ‘한국SC은행’으로 은행 이름을 바꿨다. 국내 고객에게는 생소한 브랜드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실제로 국내 소매금융(리테일) 영업 기반이 위축됐고 고질적인 실적 악화로 이어졌다.
그는 2015년 1월 SC그룹 첫 한국인 행장이 되면서 구원투수로 나섰다. 그러면서 과감한 구조조정을 통해 영업에 최적의 조직으로 탈바꿈시켰다. 나아가 ‘제일은행의 DNA’ 계승을 강조하며 은행이름에 ‘제일’을 집어넣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박 행장은 “마치 ‘못다 핀 꽃 한 송이’ 같았다”며 “취임 후 영국 본사를 찾아가 한국에서 비즈니스를 이어가려면 명칭에 ‘제일’을 넣는 건 선택의 문제가 아닌 반드시 해야 하는(must) 것”이라고 설득했다. 영국 본사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20여년 영업맨 내공이 발휘됐다. 끈질긴 설득은 이어졌고 결국 2016년 4월 은행 이름은 ‘SC제일은행’으로 변경됐다. 사명에 ‘제일’을 부활시킨 것은 그의 은행장 재임 기간 중 손꼽히는 ‘잘한 일’이라는 안팎의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만성 적자이던 SC제일은행도 흑자로 돌아서고 지난해 말 박 회장은 연임됐다. 박 행장은 “겨우 중환자실에서 나와 일반병실로 옮겨진 상황”이라며 “외형 성장보다 내실이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한 시기가 됐다”고 말했다. 연임의 무게가 더 도드라져 보이는 대목이다.
박 행장은 다양한 역발상 아이디어를 영업에 접목해 히트를 쳐왔다. 소매금융총괄본부장(부행장)으로 재직하던 2014년 7월에는 ‘모빌리티 플랫폼’을 은행권 최초로 도입하기도 했다. 고객이 원하는 곳으로 은행원이 찾아가 태블릿PC로 업무를 수행하는 ‘찾아가는 뱅킹’ 개념이다. 이듬해부터는 본격적으로 신세계그룹과 제휴해 신세계백화점과 이마트 안에 ‘뱅크샵(미니 점포)’ ‘뱅크데스크’를 만들었다.
최근에는 모바일 뱅킹이 확산되면서 은행들이 오프라인 점포를 축소하고 있지만 박 행장은 오프라인 점포를 다양한 용도로 활용하는 방안을 고민 중이라고 한다. 아무리 비대면이 확산된다고 해도 영업에는 감성이나 직관 같은 게 필요하기 때문에 대면영업이 더 중요해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오프라인 점포를 전국의 고객들이 자산상담을 받으러 오는 ‘사랑방’으로 만드는 것도 수많은 아이디어 중 하나다. 박 행장은 “비대면·디지털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면서도 “은행 업무 모두를 집어삼키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디지털 전환이라는 화두에 휩쓸려 정신없이 뒤따라가기보다 다양한 실험을 해보며 몸에 맞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잘 선별해내겠다는 소신이다.
그렇다고 비대면 등 디지털 전환에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니다. SC제일은행이 비대면에 최적화된 ‘키보드뱅킹’ 서비스를 선보인 후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키보드뱅킹은 별도의 애플리케이션 실행 없이 스마트폰 키보드상에서 SC제일은행 로고만 클릭하면 즉시 계좌조회 및 송금 등을 할 수 있다. 모바일 메신저 대화 중에도 간편하게 은행 거래가 가능하도록 했다. 비대면 고객과 대면 고객 모두를 잡으려는 박 행장의 실험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김민정기자 jeong@sedaily.com 사진=송은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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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충북 청주 △1974년 청주고 졸업 △1979년 경희대 경제학과 졸업 △1979년 제일은행 입행 △2004년 강남·부산 PB센터장 △2006년 PB사업부장 △2007년 영업본부장 △2009년 프리미엄뱅킹사업부장 △2011년 소매채널사업본부장 △2014년 리테일금융총괄본부장(부행장) △2015년 1월∼SC제일은행 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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