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협상 결과 미국은 우리나라 픽업트럭의 관세철폐 시점을 오는 2021년에서 2041년으로 20년 늘렸다. 현대자동차가 중소형 픽업트럭인 ‘산타크루즈’를 개발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미국에서 생산하라고 대못을 박은 셈이다. 통상 이슈가 아니더라도 높은 생산비용에 ‘산타크루즈’가 국내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국내 일자리 창출 기회는 처음부터 사라지게 됐다.
문재인 정부 들어 친노동정책에 글로벌 통상전쟁이 겹치면서 국내 일자리의 해외유출이 빨라지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 법인세 인상으로 기업환경이 나빠진 상황에서 통상이 ‘방아쇠(트리거)’가 돼 국외로 일자리가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27일 “통상문제가 일자리에 영향을 주는 요소로 떠올랐다”며 “무역전쟁이 장기화하면 고용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줄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대미 수출쿼터를 받은 철강도 상황은 비슷하다. 강관은 미국에 수출할 수 있는 물량이 반토막 났다. 임직원 수 863명인 세아제강은 미국 공장 가동률을 높이거나 장기적으로 현지기업 인수합병(M&A)을 검토하고 있다. 지난해 우리가 미국에 수출한 철강 제품은 총 362만톤으로 이 중 203만톤이 강관류다.
더 큰 문제는 반도체다. 미국과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은 우리나라와 대만산 반도체 수입을 줄이는 대신 미국산 구매를 늘리는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낸드플래시 같은 분야에서는 우리가 기술우위에 있지만 국내 반도체 수출의 70%가 중국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삼성이나 SK하이닉스의 매출이 줄거나 중국 현지 생산을 늘려야 할 수 있다. 국내 고용에는 악영향이 불가피하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우리나라 반도체를 쓰는 이유가 있는데 이를 갑자기 다른 회사 제품으로 대체하는 것은 쉽지 않다”면서도 “중국 정부 차원에서 나선다면 일부 영향을 줄 수는 있다”고 내다봤다.
이뿐만이 아니다. 삼성은 지난 1월부터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뉴베리에서 세탁기 공장을 새로 돌리고 있다. 이 공장은 삼성이 미국의 통상압력을 피하기 위해 지난해 6월 건설 계획을 밝힌 곳이다. 공장 근로자만 500여명이다. 최소 500개의 일자리가 오롯이 미국에 생긴 셈이다. 공식 부인하기는 했지만 삼성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나프타) 협상 결과에 따라 TV 생산기지를 미국에 세워야 하는지도 들여다봤다. LG전자는 미국의 긴급수입제한조치(세이프가드)에 대응하기 위해 테네시 세탁기 공장 완공을 2019년에서 3·4분기 말로 앞당겼다.
앞서 현대차는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들어선 후 미국에 5년간 31억달러(약 3조3,000억원)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미국산 안전기준만 지키면 국내 안전기준을 준수한 것으로 간주하는 자동차 물량이 연간 2만5,000대에서 5만대로 늘어난 것도 부메랑이 될 수 있다. 향후 한국GM이 국내 생산을 줄일 수 있는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움직임은 숫자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해외직접투자액은 437억달러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중소기업도 지난해 75억달러를 투자해 전년보다 13억달러 늘었다. 2016년 말 기준 국내 1위 기업인 삼성전자의 총 임직원 수는 30만8,745명으로 국내 근로자는 9만3,000여명 수준이다. 이미 해외고용이 두 배가 넘는다. 포춘 글로벌 500대 기업에 속하는 국내 대기업 7곳만 봐도 2010년부터 2016년까지 국내 직원 수는 8.5%(2만명) 늘었지만 해외 직원은 무려 70.5%(15만명)나 급증했다.
전문가들은 한미 FTA 협상은 끝났지만 언제든 미국이 통상압력을 가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세이프가드 등 대미 통상 분야 리스크는 항상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현지 생산을 늘리는 게 지름길이다. 국내 일자리 감소가 언제든 생길 수 있다는 뜻이다. 정부가 추진 중인 신남방·북방정책도 국내 기업의 해외 이탈을 가속화할 가능성이 있다.
이 때문에 노동유연성 제고와 서비스업 혁신을 서둘러야 한다는 조언이 나온다. 전직 정부 고위관계자는 “앞으로는 수천·수만개의 일자리가 한 번에 생길 수 없기에 수백개만 만들어도 정부 차원에서 관심을 갖고 지원해줘야 하는 시대”라며 “대기업이 해외로 나가는 것은 마케팅과 생산비 등 여러 요인이 있지만 통상압력이 커지는 상황에서는 국내 기업환경을 최대한 매력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세종=김영필기자 susop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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