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반은 대항해 시대였다. 유럽 국가들은 배를 타고 항로를 열고 교역을 시작했다. 항해는 큰 위험을 동반한다. 해적과 험악한 기상변화로 늘 죽음을 무릅써야 했다. 그럼에도 살기만 하면 몇십 배, 몇백 배의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줄기차게 바다로 나갔다. 그러면서 선박기술은 획기적으로 좋아졌고 투자위험을 분산시키는 보험도 생겨났다. 주식회사도 탄생했다.
대항해 시대가 멈추지 않고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모험자본(risk capital), 벤처캐피털 때문이다. 모험자본이 기술과 제도의 혁신을 주도한 것이다. 21세기인 지금도 상황은 같다. 모험자본과 혁신은 동전의 양면처럼 맞닿아 있다. 아이디어밖에 없는 초기 혁신기업에 돈을 넣는 곳은 모험자본밖에 없다. 실리콘밸리도 모험자본이 만들어낸 셈이다.
그러나 한국만 상황이 다르다. 모험자본 역할을 하는 곳이 없다.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 제품이 나오고 상장(기업공개)이 보이면 그제야 투자한답시고 과도하게 경영에 간섭하면서 기업의 목줄을 쥐고 흔든다.
전 세계적으로 경영간섭·채무보증·연대보증에 대한 부담 없이 가능성만 보고 투자하면서 성장의 과실을 나누는 새로운 모험자본에 대한 시도가 활발하다.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신규 코인을 발행해 투자금을 조달하는 암호화폐공개(ICO)다.
하지만 ICO에 대한 한국 정부의 정책은 기대하기 힘들다. 선거와 정치라는 변수까지 맞물려 있어 6.13지방선거 후는 더 예측이 어렵다. 그럼에도 이제는 앞을 바라봐야 한다. 다양한 해외 사례를 살펴보며 현실적인 정책을 내놓을 때가 됐다.
‘불법 행위를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다른 의견을 낼 사람은 없다. ICO를 내세워 사기나 불법 다단계, 신용공여 등을 하는 행위는 철저하게 막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만 변화·발전하고 성장·성숙하는 시장 상황에 맞춰 ICO에 대한 규제도 새롭게 마련해야 한다. ‘묻지마 투자’를 할 수 있는 시점은 이미 지났다고 본다. 미래를 내다보는 정부의 혜안 높은 정책과 시장 참여자의 자정 노력으로 건강한 ICO 생태계가 한국에서 싹트기를 기대한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