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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인의 예(藝)-<55>변월룡 '진달래']아련한 연분홍 꽃잎...사무쳤던 고국의 봄을 그리다

햇빛따라 반짝이는 '붉고 흰' 수십송이

달항아리·매병·바닥까지 넘칠 듯 담아

한국 근현대사 따라 떠돈 '카레이스키'

남한은 몰랐고 북한은 지워버린 천재

1994년에서야 러미술관 복도에서 발굴

"남과 북 미술사 잇는 연결고리 될 작가"

변월룡 ‘진달래’ 1954년, 캔버스에 유채, 78x59cm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봄을 안고 온 진달래가 제주도를 한 바퀴 돌고 올라와 전남 여수 영취산을 뒤덮었다. 경남 통영에서는 진달래 화전 지지고 진달래 설기 찌는 달콤하면서도 구수한 냄새가 자욱하다 한다. 진달래축제가 열리는 강화도 고려산까지 꽃 기운이 치고 오는 데는 채 열흘도 걸리지 않을테니,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4월 27일 판문점 일대에도 그림 같은 진달래가 한창일지 모르겠다. 남쪽의 꽃 소식이 봄을 알리듯 오는 1일 북한 평양의 동평양대극장에서 열리는 우리 예술단의 공연 소제목도 ‘봄이 온다’로 붙었다.

그래서 진달래다. 살에 닿는 따스한 바람으로, 코끝 스치는 풀 내음으로, 눈길 사로잡는 화사한 진달래와 함께 봄이 왔다. 환하게 핀 진달래 한 무더기가 항아리를 채우고도 넘친다. 가만있기만 해도 빛이 날 정도인데 창가에 둔 까닭에 더욱 눈부시다. 햇빛의 화사함에 꽃의 생기가 돋보이는 것은 인상주의 화풍 덕이다. 붉은색과 흰색을 진득하게 섞어 그린 꽃잎은 수십 송이이건만 어느 것 하나, 같은 것이 없다. 꽃가지 꺾어온 이는 봄을 보듬어 안고 싶은 마음을 주체하기 어려웠던가 보다. 달덩이 같은 항아리 가득 꽂고도 남아 옆에 놓인 푸르스름한 화병에까지 진달래를 담았다. 바닥에 드문드문 떨어진 분홍 꽃잎은 넘치도록 퍼 준 밥공기에 묻은 밥알 같다. 욕심이라기보다는 인심이다. 그렇게 마음을 풀어헤치는 게 봄이니까.

문 너머로 보이는 처마와 마루, 수수한 도자기 곁에 놓인 파이프와 벼루가 예스러운 정취를 더한다. 화가는 변월룡(1916~1990). ‘못 들어본 이름’이라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지난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이 탄생 100주년을 기리며 덕수궁관에서 개최한 대규모 전시가 국내 최초의 변월룡 회고전이었으니까. 한때 발해의 영토였으나 청나라로, 1860년 베이징조약 이후 러시아로 귀속된 연해주에서 태어난 변월룡의 국적은 러시아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카레이스키’라는 이름이 붙었고, 한국에서는 ‘고려인’이라 불린 영원한 이방인이었다. 니콜라이 박, 표트르 최 식으로 다른 고려인들이 러시아 이름을 사용하는 것과 달리 그는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을 개명하지 않았다. 동료들은 ‘변월룡’을 ‘뺀 와를렌’ 혹은 ‘펜 바를렌’ 이라 발음했다.

아마도 조선 말기이던 19세기 중반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신분차별과 가난을 피해 연해주로 간 것으로 추측된다. 더 잘 살고 싶어서라는 생각보다는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민들레 홀씨처럼 두만강을 건넜다. 이리 옮기고 저리 쫓겨 다닌 처지는 유대인으로 러시아에서 태어난 화가 마르크 샤갈(1887~1985)과도 비슷하다. 샤갈의 고향인 벨라루스공화국의 비테프스크는 유대 민족이 모여 살던 가난한 마을로 마치 고려인들의 연해주 같은 곳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왕실미술학교에서 그림을 공부한 샤갈은 러시아혁명 이후 망명을 택했다. 그런 샤갈에게 고향은 사랑하는 아내 벨라와 더불어 평생을 매달리게 한 그림 주제였다. 가난하고 조금은 우울한 고향 마을을 아름다운 환상으로 그려내며 샤갈은 행복해했다.

기억 속 고향을 더듬어 꿈처럼 표현한 샤갈은 그나마 나았으려나. 가 본 적 없는 부모의 고국을 그리워했다는 점에서 변월룡의 마음은 차라리 덩리쥔(등려군·1953~1995)과 더 닿아있을 법하다. 우리에게는 영화 ‘첨밀밀’의 동명 주제곡으로 알려진 덩리쥔은 대만에서 나고 자라 중화권을 중심으로 일본까지 아시아 전역을 누비며 활동했지만 정작 중국 본토에는 가지 못했다. 대표곡 ‘월량대표아적심(月亮代表我的心)’을 풀어 부제로 삼은 전기 ‘등려군-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하죠’(글항아리 펴냄)에 따르면 효심 지극했던 그녀는 막 개혁·개방이 시작되던 중국에서 “낮에는 덩샤오핑이, 밤에는 덩리쥔이 지배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인기였다. 그의 목소리는 중국인의 심금을 울렸지만 정부는 천안문 사태 때 민주화운동을 지지한 그녀의 노래를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결국 죽는 날까지 중국 땅 한번 못 밟았다. 덩리쥔과 모국은 그의 노래에 등장하는 연인들 만큼이나 엇갈렸기에 달빛처럼 목소리만이 사람 대신 언 땅을 울렸다.

변월룡은 남한이 몰랐고 북한이 지워버린 화가다. 가난한 신한촌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인 자녀들만 다니는 학교를 다녔으나 미술 실력으로 낭중지추였다. 주변 사람들이 재능을 알아봐 미술학교로 등 떠밀었고 스승의 권유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러시아 최고의 미술교육기관인 레핀예술대학에 진학한다. 그림 재주 하나로 러시아대륙을 가로질렀다. 1951년에 예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니 한국인 미술분야 박사는 그가 최초였다. 1953년 모교 레핀예술대학의 데생과 조교수가 된 그를 당시 소련 문화성은 북한으로 파견한다. 전쟁으로 파괴된 평양미술대학을 재건하고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을 전수하는 것이 임무였다.



가 본 적 없는 부모의 고향이었음에도 작품 곳곳에 한국적 향수를 묻혀 소수민족의 정체성을 투영하던 변월룡이다. 처음 고국 땅을 밟은 것이 1953년 7월이었고 ‘진달래’를 그리던 1954년에 난생처음 진달래를 봤으리라. 러시아에는 진달래가 피지 않는다. 한국과 중국·일본 등 동아시아에서 주로 서식하며 우리 산천에 흐드러지게 피는 야생 진달래는 영문 이름도 ‘코리안 로즈베이(Korean Rosebay)’이다. 이원수의 노랫말에 홍난파가 곡을 붙인 ‘고향의 봄’에서 복숭아 꽃 살구 꽃과 함께 아련한 향수의 한 자락을 차지할 만한 꽃이다.

“형식적으로는 민족주의, 내용적으로는 사회주의”를 요구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뛰어난 변월룡이 원래 탁월한 분야는 인물화, 군상이었지만 북한에 머무르던 시기에는 ‘어느 흐린날의 금강산’ 등 소박하지만 자신에게 의미있는 풍경을 종종 그리곤 했다.

변월룡 ‘1953년 9월 판문점 휴전회담장’ 1954년작, 28.1x47cm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인 ‘1953년 9월 판문점 휴전회담장’도 그중 하나다. 빈센트 반 고흐의 1888년작 ‘아를의 밤의 카페’에 놓인 초록색 당구대 같은 느낌의 탁자들이 등장한다. 고흐의 녹색 당구대는 핏빛 붉은 벽과 대조를 이루며 술 취해 흔들리는 몽환적인 카페에서 홀로 중심을 잡고 있었다. 반면 판문점 회담장의 녹색보 덮인 탁자는 사람 하나 없는 그곳에서 봄을 기다리는 이끼같다. 조용하고 쓸쓸한 내부와 달리 창 너머 바깥이, 새어든 햇빛이 너무나 밝아서 역사적 비극이 더 두드러질 뿐이다. 이후 변월룡은 평양미술대학 학장으로서 대학 설립에 크게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 당국은 그의 이름을 철저하게 지웠다. 화가 램브란트를 존경했고 굽은 소나무를 즐겨 그린 그가 귀화하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이처럼 변월룡의 삶과 예술은 일제강점기, 분단과 전쟁, 이념대립 등 한국의 근현대사를 비롯해 공산주의 혁명과 1·2차 세계대전, 전체주의, 냉전, 개혁과 개방을 겪은 러시아와 동아시아의 역사를 관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미술사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그는 1994년 국립러시아미술관 복도에 걸린 그림에서 한국인의 피를 느낀 미술평론가 문영대(58)씨에 의해 발굴됐다. 이후 반평생을 작가 연구에 매달린 문영대 평론가는 변월룡을 “통일 한국 미술사에서 남과 북을 잇는 연결 고리가 될 작가”로 평가했다.

세 돌이 안 된 작은 아이는 자다가도 더듬거리며 두 살 위 오빠를 찾곤 한다. 전날 싸우고 때리고 맞고 울었던 건 기억조차 안 나는 모양이다. 아침에 깨면 실없을 정도로 마냥 웃는 아이들이, 그래서 피붙이인가 보다. 이 남매는, 우리 형제는 과연 어떤 노래를 함께 부르게 될까.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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