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는 ‘한미FTA 개정협상 관련 보도참고’라는 이름의 자료를 냈습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결과를 담은 것입니다.
산업부는 ‘협상평가’ 항목에서 “핵심 민감분야(red-line)에서 우리 입장을 관철했다”며 농축산물 시장 추가개방을 막은 것을 제1의 성과로 내세웠습니다. 그럴 만했습니다. 농축산물은 우리나라에 아킬레스건입니다. 이명박 정부 때 광우병 사태도 겪었지만 농산물 개방은 우리에게 어렵고 어려운 부분입니다.
언론은 이를 높게 평가했습니다. 국민도 마찬가지였죠. 하지만 며칠 안 돼 충격적인 사실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이 농산물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美 농산물 개방 언급도 안 해…앉아서 지킨 농업
이게 무슨 말일까요. 지난해 한미 FTA 공동위원회에서 미국은 원론적 수준에서 시장접근 개선이 필요하다고 밝히긴 했습니다. 하지만 올 들어 시작된 공식협상에서는 농산물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미국산 쇠고기 때문이라는 게 통상 전문가들의 말입니다. 분석은 이렇습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쇠고기 수출이 잘 되고 있는데 괜히 FTA서 또 농산물 시장을 열라고 했다가는 백파이어(back fire·역효과)가 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우리나라에서 제기된 긴급수입제한조치(세이프가드)나 보복관세를 파악하고 있었던 셈이죠”
그럼 여기서 되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이 공식협상에서 요구도 하지 않았다면 농산물은 그냥 앉아서 지킨 게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제1 성과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죠. 실제 농림축산식품부는 FTA 공식협상에 참가도 안 했습니다. 미국이 관심조차 없으니 회의가 나갈 일이 없었던 셈입니다.
이런 상황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김현종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지난 5일 “농업에서는 아무런 협상이 없었다”며 “농업은 우리의 금지선으로 농업이 거론되는 순간 협상을 깰 준비가 돼 있었다”고 강조했습니다. 해석하면 농업이 금지선이어서 미국이 이를 요구하면 깰 생각이었다는 뜻입니다. 한미FTA 재협상이 깨지지 않고 타결된 것을 보면 미국이 농업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요구도 안 했는데 그게 성과라니 너무 부풀리는 것 같다”는 말이 정부 안에서 나올 정도입니다.
거세지는 FTA 성과 논란
이렇게 되면 생각이 꼬리를 뭅니다. 농산물을 지키는 대가로 픽업트럭과 혁신신약 제도 등의 분야에서 양보를 했다면 말이 되는데 전제부터가 흐트러졌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픽업트럭과 혁신신약제도 양보는 생각보다 피해가 더 클 수 있다는 지적이 통상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옵니다. 당장 픽업트럭은 이번이 두번째 연장입니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상반기 중 가입을 고려하고 있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미국은 일본에 픽업트럭 관세(25%) 철폐기간을 30년으로 제시했습니다. 우리가 TPP에 가입하게 되면 2041년 이후로 더 연기된다는 뜻이죠. 2041년이라는 숫자가 무의미해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2041년을 얘기하는 건 문제라는 것이죠.
혁신신약도 실제 합의문구와 내용을 봐야 하지만 걱정의 목소리가 많습니다. 2010년 재협상 당시 미국이 집요하게 요구했던 부분이기도 하죠. 혁신적인 신약의 약가를 최대 10% 높게 쳐주는 게 이 제도의 골자입니다. 미국 기업들이 이 혜택을 제대로 보게 해달라는 게 이번 협상의 결과인데요. 전문가들은 건강보험 재정 부담이 급격하게 늘어날 수 있다는 점과 함께 사실상의 내정간섭이라는 우려를 내놓습니다. 최신 바이오 신약 같은 경우 약값이 억단위까지 나가기 때문입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조차 “건보 재정에 어떤 영향을 줄지 세부 협상을 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합니다.
철강 협상 최근 3년의 의미
철강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부는 우리가 미국과의 철강협상을 가장 먼저 마쳤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최근 3년(2015~2017년)치의 70% 쿼터를 설정한다고 했습니다. 앞으로는 최근 3년치 평균의 70%만 미국에 수출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게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미 철강 수출은 △2011년 257만톤 △2012년 334만톤 △2013년 346만톤 △2014년 497만톤 △2015년 440만톤 △2016년 346만톤 △2017년 362만톤 등입니다. 이미 2015년부터는 미국의 통상 압력에 철강 수출을 줄이기 시작하던 때입니다. 즉 이번 협상에서는 대미 수출이 최고조였던 2014년은 빠졌습니다. 이를 빼면 우리가 향후 미국에 수출할 수 있는 물량(쿼터)은 크게 줄어들 게 됩니다. 최근 3년이냐, 4년이냐, 5년이냐의 차이는 그렇게 큽니다.
물론 협상을 가장 먼저 마쳤기 때문에 그만큼 리스크 요인이 제거됐다는 점은 인정받을 만합니다. 상대적으로 덜 좋은 것이라도 결과를 아니까 앞으로 대응전략을 짤 수 있겠죠.
그러나 내용을 보면 자랑할 만한 협상은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서희나 처칠을 거론하며 성과를 동네방네 알릴 정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약소국의 어려움 그러나…
대한민국은 수출로 먹고 사는 나랍니다. 통상은 자존심이 아닌 생존의 문제입니다. 초강대국 미국과의 협상은 처음부터 우리가 몇 수 접고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지금처럼 북핵 같은 안보 이슈가 걸려있을 때는 더 합니다.
문제는 이런 부분입니다. 결코 내세울 게 없는 협상을 마치 개선장군인양 국민들에게 설명하면서 미국에 쭉정이만 주고 온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정부는 한사코 부인하지만 우리는 미국과 환율합의를 해야 하며 방위비 협상도 별도로 추진 중입니다. 별도로 천문학적 규모의 미국 무기를 더 사야 합니다. 어떻게 이 모든 것들이 별개인가요? 협상의 달인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는 모든 게 같은 판에서 이뤄지는 게임일 뿐입니다.
물론 정부의 입장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닙니다. 이 정도면 잘 했다고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정부 내에서도 “하나도 못 건질 줄 알았는데 그거에 비해서는 잘 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특히 안보 이슈가 있습니다. 통상을 내주더라도 북핵 문제가 풀리고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온다면 100% 납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내세울 것 없는 협상을 최고의 협상인 것처럼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재협상의 성과는 지금이 아닌 훗날 드러날 것입니다.
/세종=김영필기자 susop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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