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시인이라고들 하는데 너무 젊어서 깜짝 놀랐죠?”
솔직하고 화통한 성격 그대로 유쾌하게 인사를 건넨 시인이자 동국대학교 석좌교수인 문정희(71·사진). 그는 그의 말대로 너무 젊었으며, 예민하고 섬세했다. 감각적인 감성의 나이만 보자면 기자가 만난 가장 ‘젊은 시인’이었다. 내년이면 등단 50주년을 맞이하는 그가 최근 4년 만에 14번째 시집 ‘작가의 사랑(민음사)’을 펴냈다. ‘미투(#MeeToo·나도 당했다)’ 캠페인이 확산하고 곪고 곪았던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어느 정도는 각성과 정화의 계기로 작용하는 요즘이다. ‘시인의 언어’로 미투운동에 지지를 보내고 있는 문 시인을 강남구 삼성동의 한 카페에서 서울경제신문이 만났다.
‘겨울사랑’ 등은 드라마 ‘키스 먼저 할가요’ 등에 삽입될 정도로 특유의 지적이고 일상적이며 여성적인 감성을 담은 작품으로 커다란 사랑을 받았던 시인은 이번 ‘자백’ ‘졸혼’ ‘애인’ ‘딸아’ ‘곡시(哭詩)’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등으로 상처받은 여성들을 위로했다. 그리고 남성의 역사인 ‘히스토리(History)’ 가 가린 ‘허스토리(Herstory)’를 꺼내 “여성의 삶의 질곡을 표현하는 인류의 언어이자 문정희만의 미학”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곡시’의 주인공인 실존인물 김명순(일제시대 소설가)은 문단 내 성폭력의 첫 번째 희생자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김명순은 이응준으로부터 데이트 강간을 당했으나 가해자가 이를 부인하는 가운데, 동료 문인 등 주변인으로부터 2차 성폭력을 당하면서도 홀로 이를 헤치며 살아나갔다고 한다.
문 시인에게 이번 시집을 ’미투 캠페인‘과 연관 짓지 않을 수 없다고 물음을 던졌다. 이에 그는 ‘미투’를 “세계적인 혁명”이라고 규정하면서 “여성들이 수십 년에 걸쳐 당한 폭력, 이전에 당한 성폭력 등이 이제 서야 드러나고 있고, 그런 가운데 억울한 사람들도, 변명도 있을 수 있으나 사회가 적어도 그것이 범죄다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넘어가는 게 커다란 소득”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이전부터 나는 페미니즘 시를 썼는데 이제야 이런 시가 주목받는 것 같다”며 “이것 역시 달라진 사회 분위기”라고 덧붙였다.
여성 문인을 가리켜 ‘여류 작가’라고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도 ‘줄광대’를 통해 그동안 불편했던 생각을 전했다. “‘여류 시인’ ‘여류 작가’라는 표현은 바람직하지는 않죠. 일본에서 건너온 말이기도 하고요. 남성 시인들은 ‘남류 시인’이라고 하지 않죠. 감정이나 신세타령 자기변호에 치우친 문학을 하는 여성들을 공격하는 데 사용되는 호칭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집의 표제작인 ‘작가의 사랑’에서 그는 “애국심은 팬티와 같다. 눈만 뜨면 팬티를 입고 흔드는 거리에서 자란 나는 하나를 벗었지만, 그 안에 센티멘털 팬티를 또 겹겹이 입고 있었지. 사랑은 참 참 어려워. 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라며 우리 사회의 파시즘적 분위기에 대해 위트있는 은유로 비판했다. “나는 시인으로서도 인간의 본질로서도 그렇고 가장 자유롭고 가장 고독하고 독특한 독자적인 삶을 살고 싶었어요. 그런데 독자적인 삶이 전통 속에서는 허락되지 않았죠. 이뿐만 아니라 일제히 똑같이 외치는 구호들을 배겨내기가 힘들었죠.”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등단한 그는 내년이면 시인으로서 탄생 50주년을 맞이하지만 여전히 성장에 대해 갈망하고 있다. ‘그가 나의 연인은 아니었지만’에서 “아 안 늙었네. 그 사이 우리는 늙었다기보다는 더 큰 키를 가진 작가가 되어야 했지. 천돈의 불에서 꺼낸 도자기처럼”이라고 읊조렸다. 그는 “(나의)문학이 성숙한 것 같다. 호기심과 상상력으로 작업을 했다”면서 “50년이라는 세월 동안 끊임없이 확장하고 성장한 것을 부정할 수 없고, 여전히 성장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 시인 중 문정희만큼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이도 드물다.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일본어 등 수 많은 언어로 번역됐으며, 일본 시인 다카하시 무쓰오는 그를 “우연히 한국땅에서 태어난 것일 뿐, 그녀의 진정한 생국은 시의 나라”라고 평했다. 이에 대해 그는 “소월이나 미당의 시에 비해 내 시는 번역을 하면서 잃어버리는 언어가 적은 것 같다”며 “한국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감각 자체는 한국적이겠지만, 너무 말이 안되는 것을 쓰지는 않은 것이 해외에서도 공감을 얻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연승기자 yeonvic@sedaily.com 사진=송은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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