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관·본능에 충실한 시어
거침없는 문체로 드러내
‘반항·불온’ 수식어 붙어
엄마-시인 사이의 갈등
육아·글쓰기 병행 쉽잖았지만
두 아이와 함께하며 치유 받아
오히려 의식 더 자유로워져
‘맘 넓은 엄마시인’ 문혜진
시·동시 쓸때 느낌 다르지만
언어 탐구·새로움 고민 같아
마음에 닿을 수 있는 詩 쓸 것
인터뷰하러 나갈 때면 으레 검은 옷이다. 첫 시집 ‘질 나쁜 연애’ 이후 지난 2007년 제26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 ‘검은 표범 여인’의 시인 문혜진(42)이니까. 이름 앞에 ‘한국 시(詩)의 록 스피릿’ ‘반항과 불온의 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그에게는 어두운 검은 정장이 당연했다. 하지만 약속한 시간이 다가올 즈음 시인은 황급히 집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었다. 몸에 착 붙고 길게 떨어지는 검은 옷 대신 사각거리는 포플린 소재로, 커다란 꽃무늬가 시원스럽게 놓인 밝은 원피스를 입고 다시 나왔다.
“어린이들을 위한 동시집을 내놓은 ‘지금의 나’에게 검은 정장이나 과한 치장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꾸미는 일일랑 말아야겠다 싶어서 화사한 원피스로 갈아입었어요.”
스스로 ‘엄마 시인’이라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인 문혜진 시인을 어린이날을 앞둔 4일 서울 종로구 부암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사실 그는 엄마와 시인을 병행하는 지금의 상황을 은근히 즐기는 듯했다.
‘낯선 여행지에서 어깨에 표범 문신을 한 소년을 따라가/하루 종일 뒹굴고 싶어/가장 추운 나라에서 가장 뜨거운 섹스를 나누다/…하지만 네가 잠든 사이 나는 허물을 벗고/스모키 화장을 지우고 발톱을 세워 가터벨트를 푼다/세상에서 가장 높은 하이힐을 벗어 던지고/사로잡힌 자의 눈빛으로 검은 표범의 거처에 스며들거야…(하략)’(‘검은 표범 여인’에서)
물컹거리고 일렁거리는 본성을 스스럼없이 거침없이 드러내던 문 시인이었다. 특히 그의 시어는 여성의 욕망에 충실했다. 하지만 ‘나쁜 여자’가 ‘좋은 엄마’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오히려 ‘솔직한 여자’는 ‘맘 넓은 엄마’였다. 결혼하고 십수년 지나며 ‘팜파탈’이 ‘동시 쓰는 엄마’가 됐다. 큰애가 초등학교 6학년이고 작은아이가 1학년이 되는 동안 그는 아이의 언어를 익혔고 아이를 위한 시를 쓰기 시작했다.
‘판다 판다 코 판다/아기 판다 코 판다/후비적후비적 코딱지/동글동글 굴려서/한입에 쏙!/아이 맛있어!’(‘아기 판다 코 판다’에서)
문 시인은 2013년 출간한 ‘사랑해 사랑해 우리 아가(이하 비룡소 펴냄)’로 시작해 ‘의성어 말놀이 동시집’ ‘의태어 말놀이 동시집’, 최근에는 ‘음식 말놀이 동시집’까지 본격적으로 영유아와 어린이를 위한 시집을 냈다.
“시를 쓰던 정서와 결혼생활의 괴리를 어찌 다 말로 표현하겠어요. 한참 애들과 씨름할 때는 내적 충돌이 많아 시도 잘 안 써지더군요. 하지만 그 고통과 인내의 시간 덕분에 여리고 투명한 존재들과 교감하며 경험해보지 못했던 감정과 시간을 살 수 있어 충만하고 행복했죠. 그 진폭이 오히려 마음에 들어요.”
이번 ‘음식 말놀이 동시집’의 ‘뮤즈’는 둘째 아이였다. 두 번째 키우는 아이는 첫째의 버거움이 없었고 마냥 예뻤다. 이제는 아이와 뒹구는 일상이 시의 소재가 되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밥을 먹이며 옹알거리는 말들을 들으며 “아우 아우 여우야/아우 아우 아욱국 먹고(‘아우 아우 여우야’에서)”를 노래하고 “꿀꿀 돼지야/맘마 먹자!/그래그래/꿀꺽! 꿀꺽!//그래도 돼지(‘그래도 돼지’에서)”를 속삭이게 됐다. 십여년 전 시집에 쓴 ‘홍어’라는 시에서 그가 “오랜 세월 미식가들은 탐닉해 왔다/홍어의 삭은 살점에서 피어나는 오묘한 냄새/온 우주를 빨아들일 듯한/여인의 둔덕에/코를 박고 취하고 싶은 날/홍어를 찾는 것은 아닐까”라고 한 것을 기억한다면 과연 같은 사람의 시인가 의심마저 들 일이다.
문혜진은 1998년 ‘휴양지에서의 여름’으로 문학사상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처음부터 남달랐고 유독 직관과 본능에 충실한 자유로운 시어를 거침없는 문체로 내뱉던 그였다.
“원래 본능과 직관에 관심이 많았고, 또 그때는 젊기도 했죠. 뜨거운 피에서 흘러넘치는 대로 썼던 것이죠. 경북 김천에서 나고 자라 서울에서 살아가던 나는 산동네 고향을 떠나온 도시 이주민으로서 느끼는 불안과 위협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도시에서 살아남고 살아가기 위한 야성에 관심이 많았죠.”
하지만 시인의 결혼생활은 쉽지 않았다. 특히 예술가로서 구상하고 고뇌하며 보내는 시간은 이해받기도 어렵고 보상도 없다. 주부생활과 작가생활은 경계가 모호했고 충돌도 많았다.
“그림자 노동이 많았어요. 눈에 띄는 일은 아니지만 가사와 육아, 글쓰기를 병행하면서 경계도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일들이 많았어요. 가부장제의 구조적인 문제를 자각하지 못하고 자꾸만 내가 잘못한다고 책망하다 보니 번뇌와 불안이 많았죠. 하지만 지금은 아이들을 통해 치유되고 오히려 의식이 더 자유로워진 것 같아요.”
아이를 위한 시를 쓰면서 시인은 어떻게 변했을까.
“젊을 때는 주체하지 못하는 감성을 노래하듯 토로하다 보니 시가 됐습니다. 그때의 나는 뜨거웠고 그렇게 터뜨려야 해소되는 게 내 기질이자 열병이었던 건가 봐요. 하지만 동시를 쓰면서 언어를 대하는 인식이 더 넓어진 것 같아요. 동시는 더 감각적이에요. 어른들을 향해 쓰는 시는 의미를 따지게 되고 함의까지 생각하게 되지만 동시는 소리나 몸짓, 감정, 말의 재미에 집중하게 되고 의성어·의태어와 단순한 시어 몇 가지를 요리해서 아이들과 소통해야 하니까 ‘언어의 요리사’가 된 것처럼 말맛을 살려 재미있게 쓰려고 노력을 하죠.”
극과 극인 듯한 이질적인 글쓰기지만 시인은 그 양 끝단을 그간 집중해온 본능적인 것과 더불어 “직관적이면서 감각적인 것”으로 관통한다. 시인은 “언어에 대한 사랑으로 언어에 대한 감각을 놓지 않고 그 안에서 우리말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한다”면서 “아이들을 어떻게 더 밝고 많이 웃을 수 있는 아이로 키울까, 더 기분 좋은 에너지를 받길 바라는 마음이 시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지난해 문 시인은 10년 만의 시집 ‘혜성의 냄새’에 80편의 글을 담았다. 여자로서 버티며 살아온 세월과 그 속에서 느낀 부당함을 꾹꾹 눌러 담은 게 읽혔던지 어떤 평론가는 “돌을 던지는 저항은 여전하되 지난 시집들이 불온한 것들을 노래하는 록앤롤이었다면 이번 시집은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비애를 연주하는 불멸의 교향곡을 연상시킨다”고 평했다.
“시인이란 관찰하면서 시적 순간을 포착해 글 쓰는 사람이니까요. 40대 초반의 여자로서 결혼과 출산, 주변의 죽음들을 경험하면서 느낀 삶의 고통과 비애를 시집에 담았어요.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오히려 그 고통을 견딜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시를 쓸 때와 동시를 쓸 때 느낌은 다르지만 양립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언어에 대한 탐구, 새로움에 대한 고민에 있다. 삶의 고통과 치열한 고민 속에서 피어난 시어(詩語)들은 서로 반대되는 지점에서도 역설적으로 통하고 있다.
“어른과 아이의 말이 다른 것 같아도 인간 본성을 관통한 그 모든 것들이 우리 안에 있어요. 인공지능(AI)의 시대가 도래해 기계가 직유와 은유의 알고리즘을 잘 쓰더라도 사람 개개인에게 축적된 경험과 냄새 같은, 한 끗 다른 그 느낌은 풀 수 없을 겁니다. 그런 작은 것들이 힘을 갖거든요. 앞으로 또 어떤 글을 쓸지 모르겠지만 그 대상이 아이들이건 누구든 새로운 언어에 대한 고민으로 사람들 마음에 닿을 수 있는 시를 쓰고 싶어요.”
이날의 인터뷰를 부모의 한없는 사랑인 어린이들과 그 소중한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상당한 부분을 희생하면서 함께 커가는 엄마들에게 선물로 바친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사진=권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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