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의 한 고깃집에는 1억5,000만원짜리 오디오 시스템이 설치돼 있다. 손님의 귀를 호강시켜주기 위해서다. 이 식당 단골들은 “삼겹살을 구우면서 고급스러운 음악을 듣는 게 묘하면서도 즐거워 자꾸 찾게 된다”고 말한다. 서울의 한 남성복 매장에도 2억원을 호가하는 최고급 브랜드 MSD의 스피커가 있다. 온몸을 휘감는 풍부한 소리 덕분에 고객의 옷 고르는 손놀림이 더욱 흥겨워진다는 게 업체 대표의 설명이다.
30대 김모씨는 지난달 프리미엄 자동차 BMW를 구입하면서 스피커를 업그레이드했다. 앞좌석 스피커 교체에만 130만원을 썼지만 전혀 아깝지 않다고 한다. 김씨는 “뒷좌석까지 바꾸려면 300만원이 들지만 예약이 꽉 차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20대 박모씨는 지난주 음악축제 ‘울트라 코리아 2018(UMF)’에 다녀왔다. 스피커가 찢어질 듯한 음악에 미친 듯이 춤을 췄다. 그는 애플의 무선 이어폰 ‘에어팟’ 신제품 출시를 기다리며 용돈을 모으고 있다.
‘귀가 고급스러워진’ 소비자가 늘면서 우리 사회와 산업 전반이 ‘고음질 시대’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고가 이어폰과 헤드폰이 불티나게 팔리고 각종 음악축제는 성황을 이룬다. 고급 오디오를 갖춘 식당을 찾아다니거나 TV·스마트폰을 살 때 음질을 꼼꼼히 따지는 소비자도 늘어나는 추세다. ‘음질전쟁’ ‘소리전쟁’이 불붙고 있는 것이다
기업들의 움직임도 바빠졌다. 수천만원짜리 초고가 스피커가 주력인 오디오 명가 뱅앤올룹슨은 LG전자(066570)와 협업해 번들 이어폰을 내놓고 수십만원대의 헤드폰도 출시했다. ‘작지만 강한’ 제품도 잇따르고 있다. 손바닥 만한 스마트폰이 고급 오디오 음질을 구현하고 종이처럼 얇아진 TV가 자체 진동하며 소리를 낸다. 골드문트·브리온베가 등 하이엔드 브랜드의 국내 상륙도 눈에 띄게 늘었다. 자동차 제조사들은 하나같이 전통 오디오 기업과 협업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그야말로 사운드 빅뱅”이라며 “소리에 기업의 생존이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대”라고 평가했다.
오디오발 산업혁명도 벌어지고 있다. ‘연결성’이 핵심인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오디오 기술’은 모바일 기기의 ‘터치’만큼이나 중요한 미래 먹거리이기 때문이다. 사물인터넷(IoT)으로 다양한 기기에 인터넷이 연결되면 우리가 익숙한 스마트폰·TV뿐 아니라 가전제품·조명·가구 등 무수히 많은 사물에 오디오가 접목될 수 있다. 이미 우리 일상에는 블루투스 스피커, 무선 이어폰, 인공지능(AI) 스피커 등이 파고들었고 고급 스피커가 탑재된 냉장고도 출시되고 있다. 시장조사 업체 IHS마킷에 따르면 지난 2010년 150만대에 불과했던 글로벌 무선 오디오 시장 규모는 올해 6,600만대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고작 3,000억원 규모로 추정되는 국내 소비자용 오디오 시장이 폭발적으로 커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셈이다.
이 같은 변화를 예상한 삼성전자(005930)는 무려 9조원을 들여 세계 최대 전장·오디오 기업 하만을 인수했다. 단숨에 하만이 보유한 JBL·하만카돈·마크레빈슨·AKG 등의 브랜드를 확보해 스마트폰·가전뿐 아니라 영화관·자동차 등에 하만 오디오를 공급하고 있다. LG전자는 뱅앤올룹슨·메르디안 등 굵직한 오디오 전문기업과의 협업을 확대하고 있다. 네이버는 ‘먹방’의 실감 나는 소리를 살리는 3차원 오디오 서비스를 내놓았다. 구글은 AI 비서 서비스를 탑재한 무선 이어폰을 선보였다. /신희철기자 hcsh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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