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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600년, ‘과학기술 DNA’ 깨우자] R&D 예산 상당수가 톱다운식... 유행 좇아 '안전한 연구'에만 쏠림

<중> 현장 체감도 낮은 R&D정책 혁신해야

정부 리더십 부재·과제목표 불분명...산업화 성과 낮아

세종의 科技 융성 핵심은 효용성 있는 연구·사기진작

규제 없애 연구 재량권 확대·컨트롤타워 구축도 필요





“내가 즉시 군기감에 명하여 대장간을 행궁(行宮) 옆에 설치하고 화포를 다시 만들어서 멀리 쏘는 기술을 연구하게 했다. 천자화포(天字火砲)는 400~500보를 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화약이 극히 적게 들고도 화살이 1,300여보를 가고 한번에 화살 네 개를 쏴도 다 1,000보까지 갔다. 이전의 여러 화포는 화살이 빗나가서 수십보 안에서 떨어지는 것이 태반이었는데 이번에는 화살 하나도 빗나가는 것이 없다. 내가 28년간 왕위에 있으며 화포에 관심을 두고 자주자주 강론하고 연구하여 제도를 많이 고쳤다.”

1445년 세종 27년 3월30일자 조선왕조실록의 일부분이다. 세종은 화약무기 연구를 독려하기 위해 군기감의 대장간을 궁궐 옆에 두고 각별한 관심을 쏟는다. 이날은 군기감 책임자를 종신직으로 하되 신하들에게 문·무관 중 네 명을 천거하라고 해 박강을 임명하기도 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장을 역임한 채연석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장은 “세종은 화약무기 개발 중 폭발사고가 발생하면 부상자들을 잘 치료해 보살피도록 하고 상을 내리기도 했다”며 “당시 여성용 권총부터 철신포 등 세계에서 가장 수준 높은 각종 화약무기를 보면 그 다양함과 창의성에 놀란다”고 밝혔다.

이처럼 최고지도자가 화약무기에 관심을 쏟자 과학기술인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 결과 1448년에는 세계 최초의 이동식 로켓 무기인 신기전(神機箭)을 개발하며 고려 말 최무선에서 시작된 화포 개발사에 화룡점정을 찍었다. 신기전은 임진왜란에서 맹활약하는데 한산도대첩·진주대첩과 함께 3대 대첩인 행주대첩에서 조선의 관군·의병·승병·백성(1만명)이 조총을 든 일본군 3만명을 궤멸(1만5,000명 사망, 9,000명 부상)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신기전은 한지로 만든 약통에 담긴 화약이 분사하며 추진력을 갖고 폭발하는데 대신기전은 길이가 5.6m에 이르고 사거리가 1~3㎞에 달했다. 이동과 각도 조절이 용이한 화차에 이런 신기전을 100발씩 싣고 발사했으니 그 위력을 짐작하게 한다.

세종의 과학기술 강국의 꿈은 비전·전략·세부 실행 방안에 능했던 지도자의 리더십, 효용성 있는 연구에 대한 과감한 투자, 동서고금을 망라한 융합연구, 신하와 백성들과의 소통으로 실현될 수 있었다. 과학기술인들의 사기 진작을 도모하고 화포개발 책임자를 종신직으로 하는 등 연구개발(R&D) 컨트롤타워를 확고히 한 것도 주효했다.

이 같은 역사적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정부가 연 20조원의 국가 R&D 자금을 정부출연 연구원과 대학·기업에 지원하면서 ‘현장에서 체감할 수 있는 R&D 정책 혁신’이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과학기술 르네상스를 열기 위해서는 결국 규제정비 등과 함께 ‘연구자의 열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문재인 정부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과기혁신본부와 과학기술자문회의·과기관계장관회의 등 컨트롤타워를 정립하고 예산 300억원 이상(총 500억원 이상) R&D 예비타당성 조사기간 6개월로 단축, 신산업 육성과 건강·안전·환경 등 국민체감형 연구 성과 확산, 연구자 제안형 프로젝트 지원 확대, 연구 현장 행정부담 완화, 기초과학 연구비 확대와 하이리스크·하이리턴 연구지원 강화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R&D 혁신 드라이브에도 불구하고 현장의 체감도는 높지 않다는 게 대체적인 분위기다. 국가 R&D는 정부가 연구주제와 범위를 결정하는 ‘톱다운’ 방식이 많고 정부 주도 연구 과제의 목표가 불분명하며 연구 현장의 규제가 다른 분야보다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연구 현장에서도 ‘될성부른 추격형 연구’가 여전해 예산의 비효율성이 지속되고 있다. 유행을 좇아 주제를 정하거나 국민 삶이나 산업화와 별 관련 없는 ‘나 홀로 연구’도 많고 정부출연연이나 대학교수들은 특허는 많아도 산업화 성과가 매우 낮은 게 현실이다. 유욱준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총괄부원장은 “연구자는 실패하면 안 돼 결과가 보이는 과제 위주로 제출한다”며 “우수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것을 연구 중 알게 되더라도 계획을 바꿔 연구할 수 없어 보장된 연구비를 그냥 소진한다”고 전했다.

대통령 직속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염한웅 부의장(포스텍 물리학과 교수)은 28일자 ‘네이처’ 기고를 통해 “정부가 R&D에 엄청난 돈을 쏟아붓고 있지만 학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연구 성과는 부진하다”며 “정부의 리더십 부재가 그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실례로 2001년 출범한 차세대 초전도체 응용기술 개발사업단은 당시 시장 수요에 대한 명확한 아이디어조차 없는 상태에서 사업이 시작됐고 결국 2013년 제대로 된 시제품 하나 없이 연구가 끝나고 말았다. 연구비 지원이 ‘톱다운’ 식이라 지난해 국가 R&D 예산(19조3,927억원) 중 연구자가 주도하는 기초연구 과제에 투입된 연구비는 6%(약 1조2,700억원)에 불과했다.

국가 R&D 예산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4.24%(2016년 기준)로 이스라엘에 근소한 차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지만 산업화나 국민체감형 R&D 성과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끊임없이 나온다. 이에 따라 신규 특허가 미국·일본에 이어 세계 3위(2016년)였지만 상업화로 이어지지 못해 특허기술료 수입은 네덜란드(R&D 예산 한국의 4분의1)의 5분의1에 불과했다.

부처별, 연구관리 기관별로 관리체계가 다르고 R&D 활동 규제가 과다하고 광범위해 통합적으로 정비해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박상욱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는 “연구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규제에 대해 연구개발규제영향평가나 연구개발규제 총량제를 실시해야 한다”며 “과학계와 시민사회 간 균형 있는 논의가 이뤄질 수 있는 공론조사를 활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제안했다.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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