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잦아진 것으로 보아 이내 장마철이 올 모양이다. 질척거리는 빗길에 투덜거려도, 그래도 비 오는 날이 좋은 이유는 비 갠 후의 말간 느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바탕 퍼부은 비가 세상 구석구석을 말끔히 씻고 지나간 모양이다. 산도 푸르고 나무도 푸르르니 기와집마저 파르랗다. 문 다 열어젖히고 책상에 앉은 선비는 어제 본 책 오늘 또 펼쳐 놓았을지라도 새롭게 읽힐 것이다. 날씨 덕이다. 능수버들이 고개 숙인 자리에서 푸른 갈대밭이 펼쳐진다. 검은 소 등에 올라탄 목동 아이는 어제 같은 오늘이 내일도 계속되려나. 한없이 평온하게 그 사이를 오간다. 멀리 물 위에 뜬 쪽배에는 세월을 낚는지 고기를 잡는지 사람을 엮으려는 것인지 모를 뱃사람이 앉아 있다. 그의 푸른 저고리가 멀리 비 걷힌 산의 색과 같다. 서옥(書屋)의 선비가 부러우냐, 소등 탄 목동이 부러우냐, 아니면 조각배의 낚시꾼이 부러우냐 물으면 한참을 망설일 것 같다. 삶이 치열하고 각박하다면, 바쁜 일상에 고향과 어린 시절을 떠올릴 여유조차 없는 사람이라면 정녕 ‘꿈엔들 잊힐리야’ 읊조릴 풍경이다. 안빈낙도의 마음으로 여유롭게 책을 읽든, 한가롭게 낚시질을 하든, 무위자연의 아이처럼 시간을 보내든 어느 것 하나 쉽게 이뤄질 리 없는 희망사항이다. 안평대군의 꿈을 그린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속세 초탈한 이상향을 그렸다면 오원(吳園) 장승업(1843~1897 추정)이 마흔아홉이던 해에 그린 이 ‘미산이곡(眉山梨谷)’도 그 못지않은 유토피아를 꿈꾼다. 뿌옇고 답답한 마음까지 시원하게 탁 틔워주는 그림이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품인 이 명품 그림이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오는 11월 말까지 열리는 ‘조선 최후의 거장-장승업×취화선’에 나왔다.
이 그림은 1961년 간송 전형필에 의해 발굴됐고 ‘이곡산장도’라는 이름으로 소개됐다. 비 걷힌 산수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짙은 농묵을 주로 사용했고 그림 전반에 촉촉한 느낌이 감도는 정감어린 산수화다. 실제 그림을 보면 처음엔 구불구불 그윽한 산세에 시선이 가고, 푸른 머리 흔드는 그림 가운데 고목의 품새에 마음이 동한다. 하지만 한번 더 찬찬히 작정하고 그림을 뜯어보면 그 안 구석구석 들어앉은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세심한 작가의 감각은 그러나 일꾼 먹일 들밥 머리에 이고 나선 여인에서 돋보인다. 아낙의 노란 저고리가 생기 있고 푸른 치마는 맑은 물색과 꼭 닮았다. 몽환적 분위기의 그림 속에 이처럼 생의 활력을 쥔 여인을 그려 넣어 방점을 찍었다. 너무도 아름답지만 ‘이건 꿈이야’ 흔들며 현실을 일깨우는 존재가 이 아낙네 아닐까.
그림 오른쪽 위에 이 작품이 그려진 내력이 적혀 있다. “미산 봉우리 남쪽에 골짜기가 있으니 그윽하고 원만하며 산수가 뛰어나다. 대체 누가 사는가. 죽계(竹溪) 노대감이니 산과 바다에 대한 사랑이 깊어 지팡이 짚고 짚신 신고 왕래했다. 오원 장선생(장승업)이 그 경치를 사생했는데, 참모습을 제대로 그렸으니 실제 경치를 대하는 것만 같다.”
자기 이름 석 자도 쓸 줄 모르는 ‘까막눈’ 장승업을 대신해 글을 쓴 이는 내용 중에 등장하는 ‘죽계’라는 사람의 조카다.
“오원 장 선생은 나의 큰아버지가 머무시는 산장을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 완성된 그림에 제발이 없으면 안되니 내가 감히 이렇게 적는다. 미산은 우뚝하고 이곡은 그윽하다. 수석은 밝고 고운데, 느릅나무와 버드나무로 가리고 덮었다. 그 중 숨고 드러나는 것은 두 서너 집뿐. 나귀는 풀 언덕에 풀어놓고 닭은 대숲에서 운다. 들 밥 이고 가는 여인네 개를 끌고, 목동은 소를 탔다. 고기잡이 배 하나, 푸른 갈대 물가에 있구나. 몇 이랑의 돌밭에, 반쯤 향기로운 차 심었구나. 황홀한 그 경치, 진짜인가 그림인가. 오원의 필묘, 또한 충분히 자랑할 만 하구나.”
아직도 죽계와 그의 조카가 누구인지, 산장이 있던 미산은 어느 지역의 산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백인산 간송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은 장승업의 산수화 대표작으로 단연 ‘미산이곡’을 꼽으며 “오원을 장식적 관념산수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지만 일종의 실경 산수인 이 그림을 놓칠 수 없다”면서 “작가의 기량은 너무나 뛰어났지만 망국의 기운이 드리워 문화적 소양도 높지 않던 조선 말기였다는 점에서 ‘시대를 잘 못 만난 불운한 천재’였다”고 말했다.
장승업은 1843년 황해도 안악 부근의 보잘 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19세기 당시 관서지방은 거의 매년 돌림병이 창궐했고 장승업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어 고향을 떠나야 했으니 시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불운했다. 흘러 흘러 상경해서는 ‘야주개’라 불리던 지금의 신문로 어디께 종이 파는 지전(紙廛)에서 더부살이를 시작했다고 전한다. 그 시절 종이가게에서는 여염집에서 쓰는 설맞이 세화(歲畵)나 문에 붙이는 그림인 문화(門畵)를 비롯한 장식용 그림과 민화(民畵)류도 함께 만들어 팔았기에 그림 볼 기회가 많았다는 얘기와 함께. 혹은 장승업이 한약방 심부름을 하며 부잣집 귀한 그림을 종종 봤다는 얘기도 있다. 옛사람들의 기억과 구술로 전하는 것이라 확실치는 않으나 이를 통해 장승업은 “한 번 본 그림은 10년이 지난 뒤에라도 안 보고 그리되 터럭 끝만큼도 틀리지 않게” 그릴 수 있는 자신의 천부적 재능을 발견한다. 이후 청계천 수표교 근처의 역관 이응헌의 집에 얹혀살면서 그 집에 수장된 명작들을 어깨너머로 보고 흉내 내 그리다 집주인의 후원으로 본격 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장승업의 재주를 심상치 않게 본 조선 말기 도화서 화원 유숙(1827~1873)이 그림을 가르쳤고, 민영환의 추천으로 궁중에 들어가 왕실을 위한 그림을 그리게 된다.
천재인 것이 악재였을까. 가진 재주가 뛰어나니 못 그리는 그림이 없었고 모방해서 그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원작 그 이상의 창의력을 발산했다. 술과 돈과 여자만 주면 그 어떤 그림이라도 그릴 수 있는 화가라 할 정도였다. 예술혼이나 작가정신은 생략된 채 거론되는 말이니, 결코 칭송은 아니다. 조선 말기에 등장해 이제 막 예술에 관심갖기 시작한 신진 부유층은 과거 사대부의 문인화와는 다르게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현세구복적인 그림들을 좋아했다. 구매자의 수요에 맞게 천차만별의 그림들을 자유자재로 그려낸 장승업이라 때로는 재주에 발목 잡혀 억지로 그리기도 했고, 그려달라는 대로 해주니 그 이상의 기량을 펼치기에는 판이 좁았다.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장승업의 산수화 8폭 그림은 어떤 이의 주문으로 제작된 것인지는 모르나 곳곳에 당대인의 소망은 물론 화가 자신의 이상이 스며있다. 그 첫 번째 그림은 도연명(365~427)이 관직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며 쓴 시 ‘귀거래사’를 담은 ‘귀거래도(歸去來圖)’인데 돌아갈 고향이 없던 장승업의 부러움이 짙게 배어있다. 돌아온 주인을 반기듯 초록 새순이 돋은 나뭇가지도 바람에 손을 흔든다. 두 번째 그림 ‘우과만벽(雨過巒碧)’은 비 그친 후의 풍광을 그렸다. 군데군데 우거진 숲과 그 숲 안에 모여있는 마을 풍경이 정겹고 따스하다. 그림 앞쪽에 우뚝 솟아 화면 중반부까지 뻗어난 소나무는 화단의 이단아로 이름 떨치던 장승업 자신을 닮은 듯 독야청청이다. 그림 옆에 “비 지나가 산봉우리 푸르고, 시내에는 노랑 어리연꽃 보인다. 뉘라서 이 맑음을 누릴까”라는 한시가 적혀 있다. 장승업은 운치있는 산수화는 물론 인물화, 꽃과 새를 그린 화조화, 털짐승을 그린 영모화, 정물화 격인 기명절지화 등 거의 모든 그림에 능통하고 탁월했으니 조선 초기의 현동자 안견, 후기의 단원 김홍도와 더불어 ‘조선 시대 3대 화가’라 불리는 게 당연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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