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으나 뜨나 별 차이가 없는 완벽한 어둠 속, 관람객들은 로드마스터의 목소리를 듣고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내딛는다. 때로는 냄새를 맡고 손으로 만져가며, 귀를 활짝 열어가며 진행된 100분 동안의 여행이 끝나면 보이지 않기에 생겼던 막연한 두려움은 어느새 사라진다. 그리고 관람객들은 어둠 속에서 시각을 제외한 감각을 통해 주변의 사물과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
지난 13일 서울경제신문과 만난 송영희 엔비전스 대표는 “‘어둠 속의 대화’가 단순한 시각장애 체험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면 한다”며 “물론 시각장애인에 대한 선입견이 바뀌는 계기가 돼도 좋겠지만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시각 없는 소통을 경험할 수 있는 콘텐츠로 자리매김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엔비전스는 지난 1988년 독일에서 시작돼 전 세계 160여개 지역에서 1,000만명 이상이 경험한 전시인 ‘어둠 속의 대화’를 국내에 전시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2010년 1월 서울 서대문구 신촌에 네이버의 도움을 받아 상설 전시관을 연 후 2014년 서울 종로구 북촌 지역으로 옮겨왔다.
그가 ‘어둠 속의 대화’의 상설 전시관을 국내에 마련하고 엔비전스를 만든 것은 시각장애인들의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서였다. 송 대표 역시 청소년 시절 실명을 하고 자신의 꿈을 접은 채 피아노 조율사나 속기사 등의 일을 해왔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늘 핸디캡이었다. 일을 맡기는 사람에게는 신뢰를 주지 못했고 자신도 스트레스를 받았다. 송 대표는 “‘어둠 속의 대화’ 속 안내자인 로드마스터의 역할은 보이지 않는다는 게 전혀 핸디캡이 아니고 충분히 강점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직업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시각장애인들이 다양한 직업을 가질 수 있어야 꿈도 다양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송 대표는 “내가 갈 길이 두세 가지밖에 없다면 꿈도 그것밖에 꾸지 못한다”며 “직업 선택의 다양화는 사회적 의무”라고 강조했다.
엔비전스의 ‘어둠 속의 대화’는 이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주말에는 300명 가까이 관람해 모든 관람 일정이 가득 찬다. 예약하지 않고서는 관람할 수 없을 정도다. 대기업들의 지원도 큰 힘이 됐다. 초기에는 네이버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최근에는 SK(034730)그룹의 사회성과인센티브 대상 기업으로 선정돼 지원을 받았다. 송 대표는 “SK로부터 사회성과인센티브를 받아 ‘디스페이스’라는 어둠 속의 대화 히스토리관을 꾸몄으며 최근에는 주4일 근무제도를 도입하는 데도 쓰는 등 실험과 도전을 할 수 있게 됐다”며 “사회적 가치 창출을 수치로 나타낼 수 있기에 전 세계 ‘어둠 속의 대화’ 모임에서 사회성과 측정 방법을 공유할 수 있느냐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현재 어둠 속의 대화 전시에는 20여명의 로드마스터가 있다. 엔비전스 직원의 대부분도 시각장애인이다. 아직은 일자리 창출 효과가 크다고 할 수 없지만 송 대표는 조금씩 더 키워나가다 보면 시각장애인에게도 다양한 일자리를 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는 “계속 미뤄왔지만 지방에도 전시장을 만들어 다양하게 고용을 늘리고 싶다”며 “개인적으로는 소리를 이용한 음악극이라든지 어둠이라는 소재로 다양한 문화 창작물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박성호기자 junpar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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