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호 서울대 전자공학과 교수는 스마트폰 등에 사용하는 반도체 기술 ‘핀펫(Fin-Fet)’을 개발한 뒤 지난 2003년 미국에서 특허를 취득했다. 삼성전자는 이와 연관 있는 기술을 휴대폰에 사용했지만 사용료를 내지 않았다. 이 교수가 특허권을 위임한 KAIST의 지적재산권 관리 자회사인 KAIST IP(KIP)가 삼성전자를 대상으로 미국에서 특허권 침해 소송을 제기했고 최근 미국 텍사스 동부지법 배심원단은 이 교수의 손을 들어줬다. 배심원단은 삼성전자의 특허침해가 인정된다며 약 4억달러(4,400억원)를 배상하라고 평결을 내렸다. 전문가들은 이 재판과 관련해 국내에서 특허침해 소송이 벌어졌다면 이 교수 측은 수십억원도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 특허법 관련 전문가는 “국내에서는 특허침해에 따른 피해를 이 교수 측이 증명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내용은 삼성전자의 기업비밀과 관련돼 증빙이 쉽지 않다”며 “법원으로부터 최소한의 피해만 인정받게 될 가능성이 높으며 이 경우 배상액은 수십억원 수준에 그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실제 해당 기술에 대한 국내 특허를 보유한 KAIST 측은 국내에서 삼성전자를 대상으로 특허권 침해 소송을 제기하지 않았다.
정부가 지식재산 4대 강국을 표방하고 있지만 특허권에 대한 보호는 여전히 걸음마 수준이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특허기술을 탈취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데다 특허권을 보유한 기업이 특허침해 소송에서 실질적인 보상을 받지 못하고 시간과 돈만 허비하는 일도 여전하다. 특허권자를 보호하고 악의적인 기술 도용을 막기 위해 국회에 여러 법안이 올라가 있지만 여전히 소위원회의 문턱도 넘지 못한 채 잠을 자고 있다. 전문가들은 스타트업의 특허기술 개발을 활성화하고 건전한 기업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 특허권자에 대한 보호 법안을 하루빨리 통과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 특허권자를 보호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조치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로 평가된다. 특허청과 홍의락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1년 사이 국내 특허 소송 판결에서 손해배상액 평균은 7,800만원이었다. 미국의 경우 손해배상액 평균이 102억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131분1에 불과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일부 기업들은 특허권 침해에 아랑곳하지 않고 해당 기술을 무단 도용한 뒤 소송에서 지면 1억원도 되지 않는 배상을 하고 무마하는 방식을 선택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BLT특허법률사무소의 엄정한 변리사는 “우리나라의 경우 특허권자가 소송을 통해 승소하더라도 손해배상액이 지나치게 적어 고의적 침해 행위가 무수히 발생하고 있다”며 “고의 침해에 대해서는 손해배상액을 대폭 올려야 부당 기술 도용 행위를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특허침해 판결에서 피해자인 중소기업의 승소율이 지나치게 낮다는 점도 손해배상제도를 강화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로 꼽힌다. 법적 처벌이 약하다는 점을 악용해 가해자가 쉽게 기술을 무단 도용하는데다 소송에서도 막대한 자본력과 소송 전문 인력을 투입해 이겨버리기 때문이다. 소송이 장기화될수록 중소기업의 부담이 가중된다는 점에서 피해자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현재 자유한국당 의원실 자료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3년까지 기술탈취 등을 이유로 중소기업이 대기업을 상대로 낸 특허침해(가처분 신청 포함) 소송에서 중소기업의 승소율은 10.1%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본안 소송까지 진행한 20건 가운데 중소기업이 승소한 사례는 전무했다. 반면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상대로 한 특허침해 소송(가처분 신청 포함)의 승소율은 40%로 중소기업보다 4배가량 높았다.
정치권에서도 이 같은 문제점을 파악해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담은 특허법 개정안이 여럿 올라와 있다. 원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8월 대표 발의한 법안은 타인의 특허를 고의 혹은 과실로 침해했거나 우월적 지위를 활용해 탈취할 경우 손해액의 3배까지 배상하도록 하는 방안을 담고 있다. 6월 홍 의원이 대표 발의한 의안의 경우 배상액이 이보다 더욱 크다. 홍 의원 안은 특허권 침해를 엄단하기 위해 침해자에게 손해액의 10배까지 배상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법안은 지속적으로 발의되지만 협의가 거의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다. 원혜영 의원실 관계자는 “해당 법안에 대해 여야 간 의견 차이는 거의 없다”며 “소위원회에서 논의만 되면 통과될 수 있지만 여러 정치적 난제로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해 법안 통과가 지연됐다”고 설명했다.
여야 간에 합의가 된다고 하더라도 걸림돌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일부 민법 전문가들은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우리나라의 법률 체계와 철학에 어긋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김관식 한남대 특허법학전공 교수는 “우리나라의 법체계는 손해가 발생한 만큼 배상하는 원칙으로 이뤄져 있고 특허법 침해자에 대해서는 형사 책임을 묻게 돼 있다”며 “미국은 특허권 침해자가 형사 고발을 당하지 않는 점을 고려할 때 우리나라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을 도입할 경우 침해자에게 과도한 형벌을 내리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다만 우리나라 현행 법에도 징벌적 손해배상을 담은 법안이 8개가량 존재하는 만큼 특허권 보호의 중요성이 인정된다면 법 통과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는 상황이다.
/강동효·이지윤기자 kdhyo@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