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은 정부 주도로 신산업 육성·규제완화 속도 빨라
곧 중간재 ‘수출 절벽’…완제품으로 中과 경쟁해야
R&D 투자 늘리고 정부선 세제혜택 등 지원사격을
50년을 기업 경영 일선에서 뛰어오면서 쌓은 식견은 날카롭다 못해 무서웠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큰 틀에서 우리 경제가 처한 상황을 짚어내는 모습은 손경식 회장이 왜 재계의 큰 어른으로 불리는지 알게 했다. 앞으로 5년 내 우리 경제의 운명이 결정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서였을까. 산수(傘壽)를 바라보는 고령이 무색할 만큼 1시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열변을 토해냈다. 서울경제신문은 창간 58주년을 맞아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으로부터 우리 경제의 현재와 미래 과제에 대해 들어봤다. 대담=김영기 편집국장
-한국의 주력 산업이 빠르게 나빠지는 것 같다. 한국은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인데 제조업의 위기 상황을 어떻게 진단하는지.
△성숙기에 진입한 것으로 보이는 자동차산업은 내수는 물론 주요 수출 시장에서 전방위적인 수요 부족 사태에 직면했다. 조선산업은 수 년째 수주 불황이 이어지고 있다. 그나마 반도체 산업이 글로벌 호황에 힘입어 수출을 이끌고 있지만 최근 성장세 둔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전통적인 제조산업이 어려워지고 있는 것은 수출 측면에서 우리 경제의 가장 아픈 부분이다. 문제는 불확실성이 확대되면서 시장 환경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 갈등이 대표적이다. 미국이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액을 10%만 줄여도 우리나라의 중국 수출이 30조원가량 날아간다. 중간재 수출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가장 우려스러운 것 중 하나가 중국의 부상이다. 굴뚝 산업부터 첨단기술까지 엄청난 성장세다.
△주력 산업이 어려워지고 있는 데는 중국의 영향이 가장 크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전통 제조업종들은 중국과의 기술 격차가 뚜렷했다. 그런데 지금은 거의 좁혀졌다. 중저가 시장은 이미 중국에 추격을 당했다. 조선과 철강·자동차·휴대폰·반도체 등 우리 주력 산업도 기술 격차가 거의 좁혀졌고 같아지기 일보 직전인 상황이다. 현실적으로 상당히 큰 위협이다. 중국의 힘은 정부 주도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데 있다. 인구 13억명의 대국인데도 신산업 육성이나 규제 완화의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 해외에서 유학한 고위 관료들이 아주 유능하다. 산업 경쟁력 측면에서 더 어려워질 수 있다.
-중국 경제의 부상에 어떻게 대응해 나가야 할까.
△두 가지 측면에서 봐야 한다. 세계 시장에서 보면 중국은 우리의 경쟁자다. 동시에 우리 경제의 큰 고객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총 수출액의 25%가 중국에서 나왔다. 해외 투자 비중은 40%에 달한다.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중간재 수출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격차가 좁혀지고 있다. 중국이 중간재도 직접 만드는 시대가 오고 있다. 머지않아 중간재 수출 절벽이 올 수 있다. 해법은 결국 완제품을 가져다 팔아야 한다. 중국 시장에서 중국 기업들과 경쟁해서 이기는 수밖에 없다. 결국에는 기업들이 연구개발(R&D) 투자를 늘려야 한다. 정부가 이를 유도해줘야 한다. R&D 투자에 대한 세제 혜택을 줄이고 있는데 이를 되돌릴 필요가 있다.
-대외적으로 위기감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정작 내부적으로도 기업 경영 환경이 어려워지고 있다. 우리 기업인들이 가장 힘든 부분은.
△어느 정부에서나 마찬가지지만 우리나라 기업인들은 정부 정책이라는 틀에 맞춰야 한다는 게 가장 큰 부담이다. 다른 나라 기업들은 그렇지 않은데 우리는 항상 그래 왔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당장 대기업들의 최대 현안은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추진하는 여러 조치들이다. 베트남에서 여러 기업인을 만났는데 마음이 아프더라. 한국 기업인들은 전부 다 한국으로 유턴 할 생각이 없다고 하는데 일본 기업들은 되돌아가려고 준비하더라. 차이는 정부 정책에 대한 기업의 부담 여부다.
-그중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큰 것은 역시 ‘속도’에 대한 부분이다.
△그 부분이 핵심이다. 기업 입장에서 보면 새로운 제도에 대한 부담이 큰데 속도도 너무 빠르다.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이 단적인 예다. 최저임금 인상부터 보자. 2년 새 30%가 올랐다. 최저임금 자체가 경제적으로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만큼 올라가야 하는 데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고용이 유지되는 상태에서 임금이 올라가는 거다. 최저임금 인상이 되레 일자리를 뺏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일자리를 흐트러트리지 않아야 최저임금 인상이 의미가 있는데 참 답답하다. 최저임금 심의 절차는 꼭 바꿔야 한다. 공익위원 9명을 정부가 임명하는데 논의의 운동장 자체가 기울어졌다. 정부는 큰 스펙트럼에서 봐야 한다. 노동자만의 정부가 아니라 온 국민의 정부다. 업종별로 최저임금을 구분해서 적용하는 제도 개선은 꼭 필요하다.
“스타트업 탄생 너무 적어…상징적 규제 하나라도 꼭 풀었으면”
게임 등 서비스업도 잘 키우면 해외진출해 수출로 연결
노조 지지 받는 진보정권이 사회적 대화 토대 마련해야
노동유연성 부족 해결 위해 고용보험 등 예산확충 필요
-주 52시간 근무제도 이대로 괜찮을까.
△7월1일 대기업부터 시작됐는데 다행히 계도기간을 두자는 제의를 정부가 받아 줬다. 하지만 6개월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여러 업종별로 다 처한 상황이 다른데 이를 52시간이라는 하나의 잣대로 묶는 것 자체가 무리다. 당초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통해 보완하자고 건의했고 고용노동부 장관도 동의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보완 작업이 없다. 각 기업별로 사정이 어떻게 되는지 조사 중이다. 이를 토대로 추가 보완조치를 만들고 정부는 물론 국회에도 건의할 생각이다.
-대내외 환경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데 정작 경제의 새로운 성장 동력은 안 보인다. 산업 전반에 대해 큰 틀에서 다시 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산업 구조의 조정이 이제는 필요하다. 전통적인 제조업에서 기술개발을 더 하고 생산성과 효율을 높이는 데 정부가 지원하는 동시에 새로운 산업을 키워 내야 한다. 대표적인 분야가 서비스업이다. 서비스업이라고 내수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얼마든지 해외 수출로 연결할 수 있다. 단적인 예가 게임 산업이다. 서비스업에서 수출을 만들어내야 한다. 앞으로 5년이 관건이다.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아내지 못하면 제조업이 밀려나는 데 따른 충격을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다. 정부가 좀 더 과감하게 움직여야 한다. 산업통상자원부 등 각 부처에서 많은 노력은 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큰 틀에서 신사업 육성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산업부뿐 아니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예산을 담당하는 기획재정부가 민간 기업과 함께 소통해야 한다. 예산뿐 아니라 각종 세제 혜택을 통해 기업들을 과감하게 밀어줘야 한다.
-새로 나오는 기업들이 과거에 비해 많이 줄었다.
△분명 아쉬운 부분이다. 전체 인구 대비 스타트업 통계를 보면 미국이 제일 높고 중국도 우리보다 높다. 인구가 적은데도 그렇다. 신성장 동력은 스타트업에서 나올 가능성이 큰데 심각한 문제다. 특히 세계 각국에서 핀테크와 원격 진료, 드론산업 등 새로운 기술 산업이 스타트업 위주로 성장하고 있다. 이미 경쟁이 과도한 분야에서의 ‘제로섬 게임’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아직 시도되지 않은 분야에 도전해 ‘포지티브섬 게임’을 만들어 내야 한다. 새로운 기업들이 탄생할 수 있도록 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이유다.
-규제가 발목을 잡고 있다.
△규제라는 게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규제를 만들었을 때 나오는 가치도 분명 있다. 규제를 완화하면 또 거기에서 얻는 가치가 있다. 문제는 이해관계자가 서로 다른 상황에서 두 가치가 충돌한다는 점이다. 경영계에서 덮어놓고 규제를 해제하라고 외치는 것은 아니다. 전체적으로 어디에 점수를 더 줘야 하느냐가 핵심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과단성이 필요하다. 책임 있는 사람이 이를 판단해줘야 한다. 예컨대 작은 규제는 담당 부처 장관이 하고, 조금 더 큰 규제는 총리가 나서고, 결단이 필요한 것은 대통령이 직접 살피는 게 방법이지 않나 싶다. 문재인 대통령이 매달 규제개혁회의를 직접 주재하겠다고 약속했다. 상징적인 규제 하나라도 꼭 풀었으면 하는 기대감이 크다.
-한국의 성장을 막는 많은 요소 중 하나로 노동 분야를 꼽는다. 지난 정부에서 추진했던 노동개혁은 손도 못 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가 뭐냐고 물어보면 첫째가 남북문제고 두 번째는 노조 문제다. 세계경제포럼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노동시장 효율성은 73위 수준이고 노사 간 협력 점수는 평가대상 137개국 중 130위다. 중심에는 강성 노조가 있는데 노조가 정말 근로자를 대표하는지 되레 물어보고 싶다. 10%도 안 되는 이들이 마치 전체 근로자를 대표하는 것처럼 한다. 이 부분부터 출발해야 한다. 노동 분야만큼은 경총이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세계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 사례 중 하나가 힘으로 밀어붙인 영국의 대처 총리다.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도 그렇게 하려고 한다. 또 한가지가 사회적 대화로 풀어낸 네덜란드인데 이쪽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노동자와 사용자·정부가 사회적 대화를 통해 한 발씩 양보해서 해결하는 게 좋다. 경총은 토대를 마련하는 역할을 할 거다. 네덜란드 전임 총리를 직접 만났고 현장 조사도 진행 중이다. 일본의 사례도 공부하고 있다.
-노동 문제의 해법을 찾는 데 있어서 이번 정부가 기회라는 얘기가 많다.
△물론이다. 얼마 전에 인도에서 경제단체들을 만났다. 인도도 대표적인 강성 노조로 꼽히는데 최근 많이 변모했다고 한다. 인도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일자리가 줄어들었고 노조 스스로 변화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 실업률은 올라가고 고용은 안 된다. 또 하나의 기회 요인은 진보정권이다. 노조의 지지를 받고 있어 대화하는 데 유리하다. 예전부터 노동개혁을 외쳤지만 보수정권하에서는 얘기 자체가 안 됐던 측면이 크다. 이번 정부 임기 내에 사회적 대화의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정부의 중요한 또 다른 역할은 안전장치 마련이다.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핵심 문제가 유연성이 부족하다는 것인데 반대로 보면 사회보험제도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당장 급진적으로 하기는 어렵지만 향후 예산 편성 과정에서 고용 보험을 충실히 하는 데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
-30년 된 노동법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노동법도 있고 근로기준법도 있고 여러 법이 얽혀 있다. 큰 틀에서 보려고 한다. 넓게 생각해서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정리하고 있다. 다른 경제단체들과도 협력하고 있다. 이를 통해 국회와 정부를 설득해 나가야 한다. 각 정당은 물론 국회 위원회 구성이 바뀌었다. 각 정당을 돌면서 관련 의견서를 전달하고 있다. 환노위를 중심으로 설득 작업을 이어 나가겠다.
-기업인들도 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다. 시대에 맞게 지배구조나 윤리경영 측면에 대한 변화의 목소리가 특히 크다.
△1950년대 창업 세대들은 정말 무에서 유를 창조한 분들이다. 말 그대로 맨몸으로 때웠다. 최근 전면에 등장한 3, 4세들은 이들과는 좀 다르다. 물론 실력이 안 되는 이들을 후계자로 삼은 것은 말이 안 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경영을 물려받은 젊은 세대들은 창업세대와는 다른 경쟁력이 있다. 열정과 분발력만 갖춘 게 아니라 해외에서 배운 지식도 있다. 해외와 교류할 수 있는 네트워크도 큰 무기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벤처기업을 탄생시킨 이들만 능력이 있는 게 아니다. 적어도 능력 있는 젊은이들이 기업 경쟁력을 끌어 올려 우리 경제를 이끌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높아진 국민들의 눈높이에 맞춰 기업의 윤리경영 수준도 한층 높아져야 한다. 그래야 지속 가능하다. 정부 역시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상생할 수 있는 산업생태계를 조성해줘야 한다. 시장의 불공정을 해소하고 잘못된 관행을 개선하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기업인의 의지를 북돋우는 것도 중요하다. 특히 지배구조와 관련해서는 획일적인 기준은 없지만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해주는 게 필요하다.
/정리=조민규·김우보기자 cmk25@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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