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1982)’는 핵전쟁 이후 인간과 복제인간 간의 대결을 소재로 한 SF영화다. 영화는 2019년의 미국 LA를 무대로 일본과 홍콩의 문화가 주류를 이룬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시아에 대한 서양의 오리엔탈리즘도 있었겠으나 당시 미국과 함께 주요2개국(G2)으로 부상하던 일본의 경제적 위상이 영화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이후 ‘잃어버린 20년’으로 표현되는 장기불황으로 일본의 위상과 영향력은 오래된 영화 속에 이야기로 남은 듯했다.
그런데 최근 일본 경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1%대의 여전히 낮은 경제성장률과 임금 및 물가수준의 정체 등 부정적인 지표에도 불구하고 일본 기업들의 회복세는 뚜렷해지고 있다. 지난 5월 말 기준으로 도쿄증권거래소 1부 상장기업(금융업 제외)의 자기자본이익률(ROE)이 10.4%로 전년보다 2% 상승했다. 이는 통계 작성이 시작된 1982년 이후 최고 수준의 기록이다.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 제2의 전성기라 불릴 만하다.
지속적인 연구개발 투자가 이러한 일본 기업의 체질개선을 가져왔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7월 일본경제신문이 발표한 ‘연구개발 활동에 대한 조사’ 자료에 따르면 조사대상 주요기업 중 43.9%가 올 한 해 사상 최고 규모의 연구개발비를 투자하고 투자 총액도 2017년 대비 4.5% 이상 늘었다. 2009년 이후 9년 연속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자동차산업을 중심으로 한 인공지능(AI)·자율주행 등 첨단 분야에 집중되는 모습이다. 4차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산업 분야 중 일본이 가장 강점을 지닌 분야들이다.
일본은 2015년 이후 4차 산업혁명을 본격적으로 대비하며 2016년 5월 ‘소사이어티 5.0(Society 5.0)’이라는 과학기술 비전을 제시했다. 생산성 향상과 제조업 강화라는 기술발전에만 한정하지 않고 저출산·고령화·에너지문제 등 사회적 과제를 해결하는 기술적 진보로 슈퍼 스마트사회의 건설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에 비해 경쟁력이 낮은 인터넷·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플랫폼에서 수집되는 가상의 정보보다 실생활에서 수집되는 정보들을 기존 산업에 적용하는 헬스케어·자율주행·첨단공장 분야에 집중하는 것이다.
최근 미중 무역분쟁으로 인해 시장의 불안이 커지고 있다.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수출의존도는 15% 수준으로 13% 수준의 미국 다음이다. 글로벌 무역분쟁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은 없지만 일본의 경제 체력은 오히려 더욱 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맞은 셈이라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일본은 늘 가깝고도 먼 나라였다. 하지만 투자의 관점에서는 이제 일본을 멀지만 가까운 대상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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