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이전에 가장 무섭게 더웠다는 1994년이었다. 히로시마아시안게임 남자 축구 8강전. 한국은 안방의 일본을 3대2로 물리쳤다. 황선홍이 멋들어진 헤딩골로 2대1을 만들었고 다시 동점이던 후반 추가시간에 황선홍이 페널티킥 결승골을 뽑았다. 사실상의 결승이었기에 선수단은 우승한 것처럼 기뻐했다. 그러나 한국은 4강 우즈베키스탄전에서 불의의 일격을 맞았다. ‘장거리’ 슈팅 한 방에 0대1로 진 것이다. 한국 축구에 지금까지도 가장 황당한 패배 중 하나로 회자되는 경기다. 당시 원바운드된 공을 골키퍼 차상광이 잡으려다 두 팔 사이로 빠뜨렸다. 그때의 우즈베키스탄은 지금처럼 무시 못할 전력도 아니었다. 한국의 소나기 슈팅은 골대를 때리거나 골키퍼에 막혔다. 한국은 결국 4위로 마감했고 우즈베키스탄은 우승까지 내달렸다.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이 아시안게임 무대에서 또 맞닥뜨렸다. 1994년의 ‘그 일’은 이미 2010광저우아시안게임 8강전 3대1 승리로 설욕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 결승까지 가지 못하고 3위에 머물렀다. 김학범 감독이 이끄는 23세 이하(U-23) 대표팀은 우즈베키스탄을 한 번 더 확실히 잡고 2018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 금메달까지 내달리려 한다. 공교롭게도 24년 전 충격패에 빌미를 제공했던 차상광은 이번 대표팀의 골키퍼 코치다.
두 팀은 오는 27일 오후6시(한국시각) 인도네시아 브카시의 패트리엇 스타디움에서 4강 티켓을 두고 다툰다. 변수는 이번에도 골키퍼다. 와일드카드(23세 초과)로 뽑은 ‘월드컵 스타’ 조현우(대구)가 부상을 입었다. 그는 지난 23일 이란과의 16강(2대0 승) 중 후반 14분 점프 뒤 착지 과정에서 왼 무릎을 다쳐 교체돼 나갔다. 8강전 출전이 어려울 경우 한국은 골키퍼 1명(전북 송범근)으로 경기를 치러야 한다. 월드컵과 달리 아시안게임 엔트리에 골키퍼는 2명뿐이다. 송범근이 경기 중 다치기라도 한다면 필드 플레이어가 골문을 맡는 최악의 상황을 맞는다. 조현우 선발 카드를 강행하더라도 정상 컨디션 때와 비교해 위험 부담이 있다.
지면 끝인데다 무승부일 경우 승부차기가 진행되는 토너먼트에서 골키퍼는 공격수 못지않은 무게감을 지닌다. 조현우의 부상 변수가 가볍게 보이지 않는 이유다. 조별리그 말레이시아전에서 공중볼 처리 실수로 선제골을 내줬던 송범근은 이란전에 긴급 투입돼 다행히 무실점으로 막으며 자신감을 얼마간 회복했다.
수비의 핵 김민재(전북)의 복귀와 활기를 되찾은 공격진은 긍정적인 요소다. 경고 누적으로 이란전에 나오지 못했던 김민재는 8강에 정상 출격할 수 있다. 우즈베키스탄은 에이스 손흥민(토트넘)만 막아서는 한국을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란전을 통해 확인했을 것이다. 이승우(엘라스 베로나)가 화려한 개인기에 이은 과감한 슈팅으로 쐐기골을 뽑으며 완전히 살아났고 황의조(감바 오사카)는 깔끔한 선제골로 절정의 골 감각을 이어갔다. K리그 성남 시절 김 감독과의 인연으로 대표팀에 뽑혔다는 ‘인맥 축구’ 논란은 쏙 들어간 지 오래다. 이란전 후반 막판 결정적인 크로스 때 나온 ‘뒷발 슈팅’ 시도만 봐도 부담 따위는 전혀 느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황의조와 이승우는 이번 대회 룸메이트다. K리그 2부리그 아산 소속의 미드필더 황인범도 화제다. 그는 이란전에서 낮고 빠른 크로스로 황의조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2선에서 만점 활약을 펼치며 국내파의 자존심을 세웠다.
손흥민 소속팀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토트넘은 24일 트위터에 “축하해, 손흥민(Congratulations Sonny)”이라는 글을 올려 한국의 8강 진출을 축하했다. 태극기를 두른 손흥민의 사진과 함께였다. 2020년 5월까지 손흥민과 재계약한 토트넘도 한국의 금메달을 응원해야 하는 입장이다. 손흥민이 이번 대회 우승에 실패해 병역 혜택을 받지 못하면 두 시즌 동안 그를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란전에서 풀타임으로 활약한 손흥민은 우즈베키스탄을 상대로 대회 2호 골을 노린다. 대표팀 주장이기도 한 그는 “3경기(8강·4강·결승) 남았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매 경기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동료들을 독려했다.
한국은 올해 1월 U-23 챔피언십 4강에서 1대4로 대패한 기억도 있다. 1대1 뒤 연장에서만 3골을 얻어맞았다. 후반 중반에 1명이 퇴장당해 수적 열세 속에 싸웠고 지금의 선수 구성과도 많이 달랐다. 어쨌거나 7개월 전의 쓰라린 패배를 되갚아주려는 선수들이 황현수(서울), 장윤호(전북) 등 여럿 있다. 홍콩을 3대0으로 완파하고 올라온 우즈베키스탄은 미드필드가 두꺼운 팀이다. 그중에서도 이번 대회 3골의 이크롬존 알리바예프가 경계 대상이다.
한국은 우즈베키스탄을 넘으면 베트남-시리아전 승자와 4강전을 치른다. 국내 팬들은 ‘쌀딩크’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과의 결승 티켓 다툼을 기대하고 있다. 쌀딩크는 베트남이 세계 최대 쌀 수출국이라는 사실에 박 감독의 능력과 인기가 2002한일월드컵 당시의 거스 히딩크에 비견될 만하다는 뜻에서 붙여진 별명이다. 베트남은 바레인을 1대0으로 누르고 사상 최초로 아시안게임 8강에 올랐다.
/양준호기자 miguel@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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