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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워치- 菌과의 공생] 생물무기, 주름잡는 '회춘신약'으로…균 정복의 역사

치명적 맹독 '보툴리눔톡신'

정제 거쳐 '보톡스'로 재탄생

체내 미생물 '마이크로바이옴'

난치병과 연관, 신약개발에 활용





지난 1991년 걸프전 당시 이라크는 39발의 스커드미사일을 이스라엘 텔아비브로 발사했다. 이라크의 기습적인 공격이었지만 사망자는 2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병원을 찾은 응급환자는 1,000여명에 달했다. 이라크가 미사일에 탄저균을 탑재했다는 괴담이 퍼지면서 너도나도 해독제의 일종인 아트로핀 주사를 투여해 부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걸프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스라엘 국민은 미사일보다 무서운 생물무기의 공포를 경험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균을 일컫는 세균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더 많이 담겨 있다.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을 옮기고 군사무기로 활용돼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다. 인류는 일찌감치 발효된 음식을 통해 세균의 존재를 어렴풋이 알았지만 이를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세균을 정복하려는 인간의 도전은 그 자체로 열망과 절망의 역사다.

세균을 이해하려면 바이러스와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지만 바이러스의 크기는 세균의 100분의1에서 1,000분의1에 불과할 정도로 작다. 세균은 하나의 독립된 세포로 이뤄진 생물이고 바이러스는 이보다 더 단순한 구조를 가진 단백질 덩어리의 일종이다.

세균은 공기나 생명체 등을 가리지 않고 혼자서 증식할 수 있는 반면 바이러스는 반드시 살아 있는 생명체의 세포를 숙주로 삼아야 번식할 수 있다. 바이러스는 백신이나 항바이러스제로 치료하고 세균은 감염된 세포를 죽이는 항생제를 써야 한다. 같은 감염성 질환일 경우 통상 바이러스가 세균보다 상대적으로 치료법이 까다롭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인류는 1796년 영국 의사 에드워드 제너가 천연두 백신을 개발하며 세균보다 먼저 바이러스 정복의 길을 열었다.

세균을 잡는 항생제가 등장한 것은 1928년 스코틀랜드 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하면서부터다. 페니실린은 1942년 상용화됐는데 인류의 수명 연장에 획기적인 공로를 한 주역으로 꼽힌다. 항생제가 없었다면 오늘날 인류의 75%는 세균성 감염병으로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는 연구결과도 있다.

14세기 유럽 인구의 절반을 앗아간 흑사병부터 스페인독감·아시아독감·사스·메르스·에볼라·지카 등 전 지구를 공포에 몰아넣은 감염병은 대부분 바이러스였다. 숙주가 있어야 생존하는 바이러스의 특성상 전염성이 강하고 돌연변이가 다양한 탓이다. 하지만 세균성 질환인 결핵·폐렴·백일해·파상풍·콜레라·수막염 등은 백신의 등장에도 여전히 끈질기게 진화하며 인류에게 고통을 안기고 있다.

김은기 인하대 생명공학과 교수는 “세균으로 만든 대표적 생물무기인 탄저균은 제조가 쉽고 비용이 저렴한 반면 살상력이 뛰어나 테러단체가 가장 선호하는 무기 중 하나”라며 “인간은 오랜 시간 세균을 연구해왔지만 자칫 나쁜 의도로 쓰인다면 지구 전체에 재앙을 가져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두 얼굴을 가진 세균은 우연한 기회에 치료제로 변신하기도 한다. 주름개선 치료제 ‘보톡스’로 유명한 보툴리눔톡신은 원래 자연에 존재하는 식중독균이 대사 과정에서 생성하는 독소의 일종이었다. 100g만으로 전 세계 인구를 죽음에 이르게 할 만큼 독성이 강해 당초 생물무기로 개발됐다. 하지만 1973년 미국 의사 앨런 스코트가 정제한 보툴리눔톡신이 눈꺼풀 떨림에 효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의약품으로 새로 태어났다.

안과용 보조 치료제로 쓰이던 보툴리눔톡신은 미국 제약사 엘러간이 1989년 주름개선 치료제로 출시하면서 생물무기에서 ‘회춘을 안겨주는 신약’으로 변신했다. 젊음을 원하는 고령층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현재 보툴리눔톡신의 글로벌 시장 규모는 4조원대를 넘어섰다.

세균을 정복하려는 인류의 도전은 이제 체내 미생물을 활용하는 마이크로바이옴(Microbiome)과 만나 차세대 신약 기술의 핵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미생물(Microbe)과 생태계(Biome)를 합친 용어인 마이크로바이옴은 체내에 존재하는 미생물 유전정보를 일컫는다. 성인의 몸에는 약 100조개의 미생물이 존재하는데 현재 알려진 것은 4,000여종에 불과해 인류가 풀어내야 할 미지의 영역으로 통한다.

마이크로바이옴이 주목받는 것은 주요 난치병이 체내 미생물의 분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연구결과가 잇따라 발표되고 있어서다. 건강한 사람은 체내에 유익균과 유해균의 비중이 각각 85%와 15% 수준으로 공생관계를 이루고 있다. 자가면역질환을 겪는 환자는 이 균형이 깨져 유해균의 비중이 훨씬 많고 전체 미생물의 숫자도 적다. 몸속 미생물을 어떻게 관리하고 유지하느냐가 질병을 치료하는 근본적인 열쇠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최근에는 장내세균이 자가면역질환뿐만 아니라 비만·치매·자폐증·암 등과도 밀접하게 연관이 있다는 연구결과도 나오고 있다. 이미 존슨앤드존슨·화이자·BMS 등 글로벌 제약사들은 마이크로바이옴 기반의 신약 개발에 나섰고 천랩·제노포커스·바이오일레븐·비피도 등 국내 기업들도 마이크로바이옴 시장 공략에 뛰어들었다.

서정선 한국바이오협회장은 “옛말에 ‘장이 건강해야 오래 산다’는 말이 있는데 마이크로바이옴의 역할이 속속 규명되면서 조만간 유산균 음료가 난치병 치료제가 되는 시대가 열릴 수도 있다”며 “국내 기업들이 글로벌 경쟁력을 조속히 갖출 수 있도록 마이크로바이옴 관련 법규와 규제를 조기에 정비하는 정책적 뒷받침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이지성기자 engin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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