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 경제가 풍부한 시중 자금에도 소비와 투자가 활성화되지 않는 유동성 함정에 빠진 데는 한국은행의 ‘실기’도 한몫을 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금리 인상 시기를 놓쳐 유동성 과잉 사태와 가계부채 폭증, 부동산 가격 상승을 유발하고 향후 경기침체 시 통화정책 대응 여력마저 상실했다는 것이다.
한은은 지난해 11월 기준금리를 한 차례 올린 후 9개월째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 통상 금리를 한번 올리면 베이비스텝으로 꾸준히 금리를 올리는 전례를 깬 것이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올해 들어서도 꾸준히 금리 인상의 필요성을 밝혀왔다. 기준금리를 한 차례 올리고 경제성장률이 낮아졌지만 여전히 통화정책이 ‘완화적’이라는 이유에서다. 현 기준금리 수준이 국제통화기금(IMF)이 제시한 중립금리 수준보다 낮다는 점도 수시로 언급했다. 하지만 한은은 금리 인상의 필요성을 말로만 설파할 뿐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한은의 한 관계자는 “금리를 추가로 인상해야 할 시점이 하필 한은 총재 임기가 끝나는 시기와 겹쳤다”고 전했다. 이 총재는 임기 만료를 한달여 앞둔 지난 3월 초 문재인 대통령의 신임을 받아 한은 역사상 최초로 연임됐다. 문제는 연임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기준금리를 올리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연임에 성공한 뒤에는 외부에서 연달아 악재가 터졌다. 미중 무역전쟁,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남북 정상회담으로 인한 원화 강세 등이다. 한 채권 전문가는 “지난해 11월 한 차례 금리를 인상한 이상 연임된 이후에는 눈치 보지 말고 최소 한 차례 추가 인상에 나섰어야 했다”며 “이런저런 사정을 보다 결국 인상 시기를 놓쳤다”고 말했다.
문제는 갈수록 기준금리를 올리기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은은 7월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총재 추천 금통위원인 이일형 위원이 금리 인상을 주장하는 소수의견을 내 인상 ‘깜빡이’를 켰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올해 두 차례 금리를 더 올릴 것이 확실시되면서 한미 금리 격차 확대 방지에 나섰다는 해석이 제기됐다. 하지만 이후 고용시장이 ‘재난’ 수준으로 악화되고 경기침체 현상도 한층 뚜렷해지면서 금리 인상은 물 건너가는 분위기다. 물가 상승률도 여전히 목표치인 2%를 밑돌고 있다. 일각에서는 올해 금리 인상은 사실상 어렵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이 경우 한미 금리 격차는 1%포인트까지 벌어질 수 있다. 금리인상을 실기하는 바람에 금리정책의 딜레마만 심화되고 향후 경기침체에도 대처하지 못하는 ‘식물’ 상태에 빠진 것이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금리 인상을 미루면 통화정책 여력이 더 떨어진다”며 “보다 과감한 통화정책을 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능현기자 nhkimch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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