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별한 집사람이 2000년 무렵 미국 ‘폴 게티 뮤지엄’에서 자원봉사를 했더랬어요. 문화는 봉사와 배려가 기본이죠. 달달 외는 지식이 문화는 아니잖습니까. 꼭 그림을 그리거나 악기를 연주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술을 통한 감동과 교화가 교양이 되고 그것이 배려와 나눔으로 익어가는 것, 그게 바로 문화예요.”
김희근 벽산엔지니어링 회장은 생활뿐 아니라 사랑도 예술 속에서 영글게 했다. 수십 년 함께한 부인이 췌장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아내 몫의 재산을 모두 털어 지난 2010년 벽산문화재단을 설립했다. 그게 고인을 가장 빛나게 기억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부인과 연극인 윤석화가 친구였던 인연으로 열악한 연극계를 들여다보게 됐고 ‘벽산 희곡상’과 ‘윤영선 연극상’을 제정해 후원하고 있다. 서지웅·나우철 등의 음악인과 이재이·김성환 등의 미술가를 지원했을 뿐 아니라 예술단체도 돕고 있다. 입시교육에 소외된 예체능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심어주고자 전문 클래식 연주단체가 직접 학교로 찾아가는 ‘넥스트클래식 공연’은 가장 보람이 큰 지원 프로그램이다. 예술은 어려서 직접 경험해본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차이가 현격하기 때문이다. 대신 김 회장은 “나는 기부자일 뿐 재단과 관련해 그 어떤 직함도 갖지 않고 관여하지도 않으려 한다”고 선언하고 한발 물러났다. 앞서 간 부인도 그런 결정에 동의할 것이라고 여겼다. 현재 재단은 송태호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이사장을 맡고 문대원 동화산업 회장, 이상렬 청운대 총장, 서민석 동일방직 회장, 김순영 추계예대 교수, 김선정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가 이사로 자문과 협력을 더하고 있다.
혼자 남은 김 회장은 더욱 예술과 문화 활동에 몰입했다. 그러던 중 한국화랑협회가 주최하는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키아프)’의 조직위원을 맡았고 운영위원인 양인 갤러리인 대표를 만나 새 사랑을 시작했다. ‘아내가 술을 못 마시는 게 좀 아쉽’지만 미술관과 박물관·음악회를 함께 다니며 공통의 관심사를 나눌 수 있어 행복하다. 양 대표는 종로구 팔판동 청와대길 초입에 위치했던 갤러리인을 운영하며 국내 젊은 작가들을 전속으로 두고 지원했으며 다양한 해외작가 전시를 기획했다. 재혼 후 김 회장은 힘겨운 화랑 사업을 정리하라고 권했고 지금은 둘이 함께 아트페어와 비엔날레 등지를 돌며 예술을 만끽하고 있다.
“교회 앞에서, 음악회에서, 미술관에서 싸우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예술을 좋아하면 다 나눔으로, 즐김으로 가게 돼 있는 것이죠.”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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