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龍山)’에 대한 기록은 서기 97년 백제 기루왕 때 처음 등장하는데 그해 한강에 두 마리의 용이 나타났다고 전해진다. 고려 말 목은 이색은 용산을 일컬어 “한강수를 베개 삼았는데 푸른 솔은 산에 가득하고 마을에는 뽕나무가 무성하다”고 했다. 신성한 동물인 용이 나타나고 당대의 학자는 아름다운 정취를 칭송한 곳. 옛날 사람들은 용산을 상서로운 운기가 서린 살기 좋은 곳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실제로 용산은 서울의 관문인 동시에 풍요의 땅이기도 했다. 노량진 나루터는 한강의 4대 도선장에서 교통량이 가장 많은 곳이었다. 과거를 보는 선비들은 남태령과 장승배기를 지나 노량진·용산을 거쳐 도성으로 들어왔다. 한강 최초의 근대적 다리 인도교(현 한강대교)가 여기에 세워진 것도 용산이 한강 이남과 강북을 잇는 가장 중요한 길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달리 용산은 굴곡진 역사를 품고 있는 한 많은 곳이기도 하다. 한강을 통해 들어오는 도성의 관문 역할을 했던 입지적 조건이 역설적으로 이 땅을 풍진 세파의 중심에 서게 했다.
용산은 우리 역사의 고금을 통틀어 하나의 거대한 군사기지였다.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는 지금의 원효로 일대에서 부대를 정비했다. 구한말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나라 군대는 용산에 병영을 꾸렸으며 흥선대원군도 바로 이곳에서 청나라로 압송됐다. 이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용산에 눌러앉아 을사늑약과 한일 병탄으로 이어지는 침략의 거점으로 삼았다.
지금은 대단위의 쇼핑 시설이 들어서 수많은 시민이 찾는 명소가 된 용산역도 실은 군수물자를 수송하려는 일제의 병참기지화 전략에 따라 처음 세워진 것이었다. 광복 후에는 미군이 주둔해 군정을 맞았고 최근 미군 사령부가 경기 평택으로 이전해 오랜 외국 주둔군 시대가 드디어 막을 내리게 됐다.
이제는 용산이 군사 요충지가 아니라 경제와 문화·주거 등 도시 기능의 중추로 새 시대를 여는 변곡점을 맞고 있다. 최근 용산은 서울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변하는 곳이다. 자고 일어나면 곳곳에서 스카이라인이 달라진다. 용산기지 이전으로 우리나라에도 뉴욕의 센트럴파크 같은 도심공원이 생길 것이다.
최근 용산 일대의 개발 정책을 두고 일어난 일련의 소요는 더 큰 도약을 위한 작은 성장통이며 결국 이곳은 도심과 강남을 능가하는 서울의 새 랜드마크가 될 것이다.
서울의 한가운데 위치해 천혜의 입지를 지녔지만 그 땅의 과실보다 역사의 아픔을 더 많이 간직하고 있는 곳. 그렇지만 용산 같은 사통팔달의 요지는 난세에는 군사 요충지가 되고 번영의 시대에는 풍요의 땅이 되는 법이다. 삼국시대 초기 나타났다던 두 마리의 용이 이제 2,000년 만에 비상(飛上)할 채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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