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이자 현대차(005380)그룹의 주요 주주인 블랙록이 행동주의 헤지펀드 엘리엇의 현대차그룹 지배구조 개선안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엘리엇의 제안이 단기 차익만을 노린 것이어서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17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블랙록은 최근 해외에서 열린 한 기업설명회(IR)에서 투자자들에게 이 같은 입장을 표명했다. 장기 투자의 대명사인 블랙록은 현대차그룹의 주요 주주로 다른 투자자에 미치는 영향이 큰 투자자다. 지난 5월 현대차그룹이 지배구조 개편을 시도할 때 직접 뉴욕을 방문해 블랙록 관계자와 접촉한 것도 이 같은 영향력 때문이다.
엘리엇은 8월 현대차그룹에 서신을 보내 주요 계열사를 분할 합병하는 내용으로 지배구조 개편안을 제시했다. 현대모비스(012330)의 애프터서비스(AS) 부문을 떼어내 현대차와 합병하고 모듈과 핵심 부품사업은 물류업체인 현대글로비스(086280)와 합치는 방안이다. 이에 대해 현대차그룹은 “지배구조 개편과 관련해 합당한 여건과 최적의 안이 마련되는 대로 모든 주주와 단계적으로 투명하게 소통하겠다”면서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블랙록은 엘리엇의 요구가 현대차그룹을 압박해 시세차익과 배당확대 등 단기 투자자를 위한 것이라며 평가 절하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신 블랙록은 현대차그룹이 기업가치를 올려 중장기적으로 주가 상승을 이끌 수 있도록 명확한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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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록은 현대차그룹이 최근 제시한 ‘모빌리티 솔루션’이라는 개념에 주목하고 있다. 완성차 제조사에서 벗어나 자동차 산업과 정보통신기술(ICT) 간 융합, 공유경제 확산에 맞춘 대안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블랙록은 현대차의 이 같은 행보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아직은 구체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IB 업계의 한 관계자는 “블랙록을 비롯해 장기 투자자인 슈퍼 롱 펀드는 국내 대기업의 지배구조 개편에 동의하면서도 장기 투자자에게 어떤 혜택이 돌아오는지 명확하게 알기를 원한다”면서 “현대차의 1차 지배구조 개편이 실패한 것도 엘리엇 주장에 동의해서라기보다는 현대차가 장기적인 기업가치 상승을 제대로 설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블랙록의 지적은 현대차 지배구조 개편의 키를 쥔 국민연금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민연금은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의 2대 주주이자 장기 투자자다.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강화는 엘리엇과 같은 단기 차익이 아니라 블랙록처럼 장기 차익 제고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익명을 요구한 국민연금의 한 관계자는 “국민연금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논의 과정에서 헤지펀드가 아니라 슈퍼 롱 펀드로서 성격을 분명히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면서 “국민연금이 주주로서 목소리를 높이되 장기투자자라는 입장을 확실히 한다면 기업과 국민연금 운용수익에 모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차그룹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현대모비스 분할법인과 현대글로비스 합병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지배구조 개편안을 추진했지만 합병 비율 적정성 논란에 휘말려 기관투자가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결국 계획을 취소했다. 최근에는 현대모비스를 분할한 뒤 상장해 합병 비율을 시장에 맡기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상장 과정이 오래 걸리고 시장에서 가격이 고평가될 수 있기 때문에 현실성이 낮다는 지적도 나온다. /임세원기자 wh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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