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둥 떠 있기만 하다면 물 위는 잠잠하다. 물결은 움직이는 순간 일기 시작한다. 그 움직임이 지속적이고 그 방향이 일관될수록 물의 흐름은 분명하게 그 모습을 그려낸다. 마치 이 헤엄치는 오리가 그리는 파문처럼. 조선 말기를 대표하는 사대부 화가 홍세섭(1832~1884)의 대표작 새(鳥) 그림 중에서도 기량 으뜸이며 전무후무한 표현력으로 손꼽히는 ‘유압도(遊鴨圖)’다.
청명한 가을 하늘을 가르며 날아온 오리 두 마리가 물 위를 스치듯 사뿐히 내려앉았다. 유유히 노니는 오리가 엄연히 주인공이건만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구불구불한 물결이다. 색 하나 쓰지 않고도 오로지 먹 하나로만 그 말갛고 찰랑대는 물의 느낌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두 발을 파닥여 배를 쑥 내민 오리 주변으로 물결이 감싼다. 물의 파문은 담묵(淡墨)으로 휘익 둘러쳐 그린 다음 먹을 좀 더 갈거나 물을 좀 더 섞는 방식으로 농담을 달리해가며 한 겹씩 더했다. 아래로 쏠린 물결의 포물선이 길게 드리운 옷자락처럼 유려하다. 이 점이 ‘유압도’의 가장 특징적인 면인데, 위에서 물 표면을 내려다보는 부감법(府瞰法)이 쓰였다. 보통 사람이 물가에 서서 보는 모습은 비스듬한 옆모습이지만 화가는 공중에서 물 자체를 보려 했다. 그랬더니 오리의 속도감과 물의 방향성이 정확히 포착됐다. 뒤에서 헤엄쳐 오는 오리가, 고개를 뒤로 돌리고 느긋하게 움직이는 앞의 오리를 이내 따라 잡을 듯하다. 두 오리 모두 물 밖으로 내민 한쪽 발이 심상치 않다. 오리들은 윤곽선 없이 담묵과 농묵의 변주로 표현됐다. 손목을 빙글빙글 돌려 살짝 꺾인 오리 목 부분을 부드럽게 그렸다. 오리 등짝의 절반 정도를 담묵으로 칠한 다음 먹을 진하게 묻혀 어깨에 점을 찍었다. 색은 옅되 약간 물기 뺀 갈필로 깃털을 뒤로, 옆으로, 위로 뽑아 그리니 그대로 오리의 움직임이 만들어졌다. 깃털 끝이 날리는 듯하다. 그런 다음 깃털 끝을 진하게 힘줘 그리니 담박한 물 위로 오리 형태가 두드러지게 부상한다. 쉬운 듯 간략한 듯한 오리 그림이나 세필로 그린 깃털의 방향 하나하나에, 깃털 끝을 진하게 힘주어 그린 부분까지 섬세한 손길이 감지된다.
이 그림의 가장 특별함 하나를 꼽으라면 물결의 파문을 따라 먹물 떨어뜨린 것처럼 드문드문 찍혀있는 농묵의 점(點)들이다. 이 점이 일견 심심해질 뻔한 화면에 묘한 파격을 주는데, 오리의 헤엄치는 속도감을 더해줄 뿐 아니라 흐트러지기 쉬운 시선을 끌어다 놓고 고정시키는 힘을 가진다. 물결의 가장자리는 약간 진한 선으로 스미듯 묘사됐다. 물속에서부터 자라나 물 밖까지 길게 나온 수초가 새의 깃털과 통하고 물결과도 연결된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학고재 펴냄)를 쓴 미술사학자 혜곡 최순우는 이 그림을 가리켜 “쾌적한 부감법의 신선한 매력과 농담을 가려 쓴 묵색의 효과는 마치 근대의 서구적 수채화법을 느끼게 해주는 맑고도 새로운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한국미술사 최고의 권위자인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가 저서 ‘한국 그림의 전통’(사회평론 펴냄)의 책 표지로 이 그림을 택했을 정도다. 안 교수는 “수묵산수화와 화조화의 요소가 어우러진 이 그림은 위에서 내려다본 듯한 부감법과 세련되고 뛰어난 묵법이 매우 참신하고 현대적이어서 이색(異色)화풍이라 부를 만하다”면서 “대화를 나누는 듯한 오리들의 모습은 소통이 부족한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고 전혀 색다른 화풍은 창작에 임하는 미술인들에게 던져주는 교훈이 많기에 19세기 조선 말기 회화사상 최고봉을 이룬 대표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고 극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세섭은 일반에게 덜 알려진 편이다. 아니, 전문가들도 그의 존재를 미처 알지 못했다. 세상 뜬 후 거의 100년간 무명에 가깝던 그를 미술사의 수면 위로 끌어올린 이는 이태호 명지대 교수다. 그가 한국미술사학회의 창립 20주년 기념호로 1980년에 나온 학술지 ‘고고미술(考古美術)’에 ‘석창 홍세섭의 생애와 작품’을 발표한 게 계기였다.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던 위창 오세창(1864~1953)이 쓴 ‘근역서화징’에서 ‘남양 홍씨 세섭’으로 기록된 홍세섭의 이야기를 찾아냈다. 이탈리아의 조르조 바사리(1511~1574)가 쓴 ‘미술가 열전’이 르네상스 거장들을 알게 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 것처럼, 파묻혔던 작가가 새록새록 ‘발굴’됐다.
홍세섭은 17세기 인조반정에 공을 세우고 영의정까지 지낸 홍서봉의 후손이다. 사대부 명가 태생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홍서봉이 예송논쟁의 한 축을 이루면서 후손들은 5대까지 적잖은 고생을 했다. 홍세섭의 큰할아버지 홍대연은 시서화에 두루 능하고 꽃과 산수를 특히 잘 그린 풍류 화가였다. 홍세섭의 아버지 홍병희도 그림을 잘 그렸다. 오세창의 기록에 따르면 “석창의 아버지 역시 그림에 능했으니 석창에게 그림을 구하는 자가 있으면 부자(父子)가 번갈아 그려서 주었는데도 사람들이 잘 판별하지 못했다”고 한다. 조선의 선비가 여가활동으로 그림을 곧잘 그리곤 했지만 홍세섭은 가풍으로 그림을 익힐 기회가 충분했다.
생계를 위해 그림을 그리는 직업화가는 아니었지만 그의 그림을 원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던가 보다. 특히 꽃과 새를 그린 화조영모화에 능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유압도’와 함께 8폭을 소장하고 있는 ‘영모도’를 비롯해 전해지는 유작들은 대부분 세로로 긴 그림이다. 병풍용으로 제작됐던 것임을 짐작만 할 따름이었는데 미술사 연구가 최경현이 홍세섭 그림으로 만든 병풍 앞에서 찍은 근대기 인물사진을 발견해 실체가 확인됐다. 오리, 백로, 따오기, 기러기, 까치 등을 각각 두 마리씩 그리되 매화, 수초, 갈대 등을 배경으로 둔 것이 사계절을 표현하게 구성됐다는 점도 밝혀졌다. 8폭의 산수화로 사계절을 보여주는 ‘소상팔경도’와 같은 구성이라 홍세섭이 기법 면에서는 현대적이라 할 정도로 참신했지만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홍세섭은 32세 때 열 살 아래의 부인을 잃고서야 정신을 차렸던지 36세에 진사에 급제해 늦은 벼슬길에 올랐다. 그 후 열여섯 살 아래의 부인과 재혼했는데도 자식이 생기지 않았던지 조카 홍재익을 양자로 받아들였다. 승정원 관직을 받고 3년 만인 52세에 세상을 떠났으니 문신으로의 역량도, 화가로서의 능력도, 꽃만 피웠지 열매 맺지 못하고 끝났다.
그의 그림 속 새는 꼭 두 마리씩 짝지어 등장한다. 들판을 산책하듯 거니는 오리 두 마리를 그린 야압도(野鴨圖)는 세밀하게 표현된 오리와 대조적으로 주변 산 풍경이 간략하게 표현됐다. 대담한 생략과 자유분방한 표현력이 추상적일 뿐 아니라 표현주의적이라고 느끼게 한다. 나무 위에서 자고 있는 새 한 쌍을 그린 숙조도(宿鳥圖)는 두 마리가 꼭 쌍둥이 같다. 대나무에 걸터앉은 동글동글한 몸통이 영근 과일처럼 탐스럽고 귀엽다. 백로도에서는 한 발을 웅크리고 자는 한 마리와 물을 응시하는 또 다른 한 마리가 부챗살처럼 뻗은 갈대 사이로 대구를 이룬다. 따오기를 그린 주로도(朱鷺圖)는 간략한 대상을 능숙하게 보여주는 홍세섭 특유의 먹 놀림이 기막히고, 물을 향해 날아드는 기러기를 그린 비안도(飛雁圖)는 한쪽은 텅 비우고 오른쪽으로만 치우쳐 물가를 표현한 과감성이 돋보인다. 아마도 사랑하는 부인과 해로하지 못하고 바라던 자식도 얻지 못한 현실의 안타까움이 화목과 축복을 상징하는 ‘한 쌍’의 새 그림으로 탄생한 것 아닐까. 취미로 그린 여기화(餘技畵)였지만 그 필치의 분방함과 파격적인 구성은 홍세섭의 흔적을 업적으로 기억하게 했다. 게다가 그는 격변하던 조선 말 역사적 과도기를 살면서 새로운 지향점을 모색하고 있었다.
눈을 크게 뜨고 시선을 바꿔 더 멀리서 바라보자.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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