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명절 직전인 지난달 18일에 시작된 남북정상회담부터 명절까지 이어진 한미정상회담 일정을 소화한 문재인 대통령의 비행 거리는 어림잡아 2만2,500㎞가 넘는다. 서울~부산 왕복거리를 1,000㎞라 치면 20배는 넘는 분주하고 장대한 일정이다. 벌써 올 들어 세 번째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졌다. 지난 2000년 역사적인 남북 첫 정상회담 이후 지금까지 총 다섯 차례의 정상회담이 있었다. 그중 세 번이 올해 열렸다고 보면 남북화해와 협력, 더 크게는 통일에 대한 진정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국민적인 열망이 녹아났기에 가능한 상황이기도 하다.
한국사학자 제임스 팔레 교수는 일찍이 강대국으로 둘러싸인 한반도의 왕국들이 아시아의 다른 지역처럼 정복되지 않고 수천년을 지속해온 특이한 상황에 주목했다. 세월을 관통해 생명력을 유지한 원천에는 탁월한 외교전략이 한 축을 담당하고 있으며 이는 실용주의 외교정책으로 대표된다고 봤다. 세 치 혀로 거란을 물리치고 강동 6주까지 회복해 한국사 외교의 백미로 평가받는 ‘서희의 담판’뿐만이 아니다. 아시아 최초의 거대 제국을 건설한 당을 상대로 그 힘을 지렛대 삼아 삼국을 통일하고 마침내 당 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낸 통일신라. 북연과 북위 등 삼국지에 등장하는 수많은 강국이 아시아에서 판을 칠 무렵, 동아시아 최대 강국으로 광활한 영토확장을 이뤄낸 장수왕. 그야말로 세계적 제국을 형성했던 원을 상대로도 왕조가 지속된 고려. 동시대 최대 강국으로 평가받는 명을 상대로도 왕조가 유지되며 번영을 구가한 조선전기 등 실용외교는 한반도의 역사를 뿌리 깊게 관통하고 있다.
실용외교는 어떤 모습일까, 여전히 유교적인 명분과 어떤 의리, 예와 같은 가치관을 기준으로는 도저히 못 봐줄 배반과 굴욕적인 사대, 창피해서 얼굴도 못들 것 같은 상황이 수시로 연출된다. 오로지 궁극의 국익과 존속을 위해서라면 말이다. 한반도에서 역사상 가장 넓은 국가로 성장했던 동아시아의 맹주 고구려였지만 북위를 상대로 조공과 사대를 지속해 북연을 깨고 백제·신라를 제압하며 강국의 번영을 이뤄갔다. 거란을 물리치기 위해 송과 국교를 단절하면서도 송에 거란을 치기 위한 군사를 요청하는 뻔뻔한 장면. 정신없는 송이 거절할 수밖에 없는 군사원조 요청을 통해 이를 빌미로 외교를 단절해 국교 단절의 책임을 송에 넘기는 장면은 실용외교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지금까지 드러난 현 정부의 대북, 대 강대국 외교전략은 분명히 실용주의와 실리 외교에 벗어나 있지 않다. 독일이 통일되기까지도 20여년간 아홉 번의 정상회담이 있었다. 소련이 개방되고 성공적인 냉전 종식이 이뤄지기까지 10여 차례의 정상회담이 있었다. 특히 1985년부터 1990년까지 매년 정례적 정상회담이 집중되며 문을 열기 위한 두드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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