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축소하거나, 해외로 이전하거나, 매각하거나. 한국의 중견·중소기업 오너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이 세 가지뿐입니다.”
벤처캐피탈(VC)을 운영하는 A대표의 말이다. 그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비하는 중소·중견기업의 상황을 다소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전통 제조업으로 상징되는 기존 산업은 업종과 지역, 정부의 정책지원과는 관계없이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도 했다.
그가 이처럼 비극적으로 상황을 바라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A대표는 경남 지역을 대표하는 한 중견 기업 오너의 2세다. 전통 제조업에 몸 담았던 그의 아버지와 그는 누구보다도 시대의 변화를 피부로 느끼고 있다. 보통 3~5년 수주 실적을 바탕으로 산업의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데 지금은 더 이상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2021년까지 매출 5,000억 달성’과 같은 본새 좋은 슬로건도 산업의 쇠퇴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서는 무의미하다.
A대표만의 기우는 아니다. A 대표가 지난 3년간 만난 200여명의 2·3세 경영진 역시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현실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면 4차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미래 산업에 발이라도 걸쳐놔야 한다는 위기감이 크다. 하지만 인공지능(AI)와 로봇, 빅데이터와 같은 4차 산업혁명 분야는 자금은 물론 절대적인 시간과 지식이 축적 되어야 하는 산업이다. 열심히 한다고 해서 단기간에 따라붙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시대적 변화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중소·중견기업 오너들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실제로 경영 승계를 포기하고 회사를 매각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한 대형 회계 법인의 인수합병(M&A)전담 부서는 이런 흐름을 포착하고 올해 미드캡으로 불리는 중소·중견기업 전담 부서를 확대하기도 했다. 오너가 직접 사모투자펀드(PEF)나 VC를 찾기도 한다. 경영에 관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지분만 남기고 전문 경영인에게 회사를 넘기는 식이다. 자식에게 회사를 물려줘야 한다는 관행도 4차 산업혁명 시대로 넘어오면서 무너진 셈이다. “산업에 오래간 종사한 사람들은 그 끝이 어디인지 알고 있다”는 A 대표의 경고가 허투로 들리지 않는다. choyh@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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