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책만 아니면 다 된다(Anything But Rho Policy)’라는 ‘ABR정책’을 내세웠다. 참여정부 때 도입된 종합부동산세는 무력화됐고 감세정책을 펼쳤으며 녹색성장을 새로운 경제의 틀로 앞세웠다. ‘747 공약(7% 성장·국민소득 4만 달러·7대 선진국진입)’도 강조했다. 하지만 녹색성장은 박근혜 정부 들어 자취를 감췄다. 빈자리는 ‘초이노믹스(최경환 전 경제부총리 주도 경제정책)’와 창조경제가 채웠다. 부동산 경기 활성화를 위해 총부채상환비율(DTI)과 주택담보인정비율(LTV)이 완화됐고 기업소득환류세제를 추진했다. 그러나 ‘초이노믹스’는 문재인 정부 들어 실패한 정책으로 낙인 찍혔고 하나씩 원상태로 복구되고 있다.
고착화하고 있는 우리 경제의 저성장 구조를 깨야 할 경제·산업정책이 대통령 임기에 맞춰 5년마다 뒤집히면서 오히려 성장률을 갉아먹는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보수와 진보는 물론 같은 진영 내에서도 정권이 바뀌면 정책을 뒤집는 행태가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5년 단명 정책에 지난 20년 동안 남은 게 없다는 뜻이다.
미래산업 육성이 대표적이다. 참여정부는 출범 초기 바이오신약과 디지털 콘텐츠 등 10대 산업에 3년간 2조9,000억원을 투자한다는 ‘차세대 성장동력산업 육성전략’을 발표했다. “혁신에 기반한 성장동력을 배양하겠다”는 게 성장 잠재력을 끌어올리려는 참여정부의 핵심 경제정책 기조였다. 차기 정부인 이명박 정부는 전 정권의 정책이 빛을 보기도 전에 간판을 ‘신성장동력’으로 바꿔버렸다. 10개였던 육성 분야는 17개가 됐고 예산배분도 조정했다. 지능형 로봇은 로봇응용, 바이오신약은 바이오제약 등으로 연속성이 유지된 것도 있지만, 상당 부분은 처음부터 평가와 분석사업을 다시 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성장동력 정책은 그 자체만으로 정권의 경제철학과 정체성을 의미한다”며 “정권이 바뀌어도 기존 사업을 유지해나가는 전략이 필요한데 우리는 이를 깡그리 무시하고 새 사업을 하려고 한다”고 지적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이 같은 관행은 반복됐다. 탄소 저감 에너지와 녹색금융 같은 이전 정부의 ‘녹색성장’ 정체성과 결부된 분야는 모두 배제한 채 ‘미래성장동력’이라며 19개 분야를 새로 선정했다. 심해저 해양플랜트와 고속·수직이착륙 무인항공기 같은 분야가 추가됐는데 이들은 현 정부에서 외면받고 있다. 이들 분야에만 수백억원의 예산이 편성·투입됐지만 지금은 사실상 예산 배정이 미미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재인 정부 역시 다르지 않다. 보수정권에서 추진되던 사업 대신 ‘핵심 선도사업’으로 스마트공장과 스마트팜, 스마트시티 등 8개 유망 분야를 키우고 있다. 참여정부 때 추진하다 끝맺지 못한 부분이다. 내실도 부족하다. 겉으로는 혁신성장을 내세우고 있지만 “창조경제와 다른 게 뭐냐”는 말이 정부 내에서 나온다. 2016년 국회예산정책처는 “우리나라는 역대 정부마다 새로운 성장동력을 발굴·육성하면서 정책 추진체계가 비효율적으로 운영되는 등 정책 일관성이 미흡하다”고 분석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분석실장은 “산업 정책에 있어서는 기업이 직면하는 불확실성을 제거해준다는 측면에서 정책 연속성이 담보돼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새 정부의 원전산업은 거꾸로 가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정책’은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과 궤를 같이한다. 그런데도 탈원전에만 매몰된 나머지 이명박 정부 때부터 쌓아온 원전경쟁력을 까먹고 있다. 당장 신규 원전건설을 줄여나가기로 하면서 원전 생태계가 붕괴될 상황에 처했다. 정유섭 자유한국당 의원실에 따르면 한국수력원자력을 포함한 원전공기업 3곳에서만 지난해 120명이 사표를 냈다. 신한울 원전 3·4호기 건설 중단으로 원자로 설비와 터빈 등 원전 주기기를 공급한 두산중공업은 5,000억원 가까이 투입했지만 향후 원전사업에 리스크가 커졌다. 원전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전 정부의 정책을 무조건 깔아뭉개야 하는 분위기에서는 정책 노하우가 쌓이기는커녕 매몰 비용만 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중장기 성장의 밑그림을 그려야 할 경제·산업정책이 정권마다 뒤집히는 것은 심각한 일이라고 보고 있다. 재정낭비만 하면서 성장 기반을 닦아야 할 기업에 오히려 불확실성만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병태 KAIST 교수는 “정부가 특정 분야를 키울 수 있다는 생각부터 시대착오적”이라면서 “정부는 유망 산업의 성장을 가로막는 규제를 없애고 교육을 통해 전문 인력을 시장에 공급하는 것과 같은 펀더멘털 측면에서 성장을 지원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한재영기자 jyhan@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