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산하 공공기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터져 나온 친인척 특혜 비리는 과속 페달을 밟은 문재인 정부의 ‘비정규직 제로’ 공약이 빚어낸 폐단이다. 공공기관별 경영 사정과 업무 특성, 고용형태 차이 같은 저간의 사정은 물론 최소한의 공정성마저 상실한 채 목표 달성에만 매몰된 결과다. 전문가들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자체가 잘못됐다기보다는 과도한 속도전이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점에서 속도 조절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정규직화 과속’의 문제점을 네 가지로 정리했다.
①신규 채용보다 많은 정규직 전환=고용노동부의 정규직 전환 실적에 따르면 334개 정부 산하 공공기관의 비정규직(기간제 및 파견·용역) 근로자는 15만1,489명이다. 이 가운데 정규직 전환이 결정된 인원은 절반이 훌쩍 넘는 8만4,714명(기간제 2만5,244명+파견·용역 5만9,470명)이다. 정부 가이드라인이 나온 지 1년여 만에 이 중 기간제 2만548명, 파견·용역 1만4,511명 등 총 3만5,059명의 정규직 전환이 완료됐다.
올 한 해 정부가 계획한 공공기관 정규직 채용 규모인 약 2만8,000명보다 1.7배 많은 인원을 군사작전 치르듯 단기간에 정규직으로 전환한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취업준비생들 사이에서는 “바늘구멍을 통과해 정규직으로 취직하는 것보다 일단 비정규직으로 입사해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게 더 나을 판”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②정규직 ‘역차별’=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논의가 있을 때마다 항상 제기되는 문제가 정규직에 대한 역차별이다. 기간제 교사들이 정교사 전환을 끊임없이 요구해왔지만 실현되지 못한 것이 이 때문이다.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어려운 시험을 패스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동등하게 대우하는 것이 오히려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이유에서다. 공공기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도 같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지만 현 정부는 이를 무시했다. 공공기관의 한 관계자는 “공채시험에 통과하기 위해서는 서류와 시험·면접 등 많은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이런 난관을 통과한 사람을 허탈하게 만들었다”며 “오히려 취업시장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꼬집었다.
③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인건비=무리한 정규직 전환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정부는 지난해 제시한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에서 정규직 채용 방식과 임금체계는 기관이 알아서 정하도록 했다. “전환을 지체 없이 추진하라”고 해놓고 정작 최대 난제인 임금체계 결정은 개별 기관에 떠넘긴 것이다. 실제 공공기관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인건비다. 호봉체계 손질 없이 무작정 정규직을 늘리면 막대한 경영 부담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노동연구원도 정규직 전환 인력들이 기존 정규직 수준의 임금과 복지 개선을 요구하면 인건비 상승으로 경영 부담이 가중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호봉제하에서 정규직 전환을 지속하고 1인당 연간 1,000만원가량의 추가 비용이 들어간다고 가정하면 8만4,000여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공공기관은 1조원에 가까운 추가 비용 부담을 지게 된다.
④민주노총까지 개입…정치 쟁점화=정규직 전환의 중심에 노조가 개입하면서 정치화되는 것도 문제다. 지난 22일에는 미화·시설·전산·경비·소방 근로자 등으로 구성된 한국가스공사 비정규직지부 조합원 300여명이 민주노총과 함께 직접 고용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야당이 고용세습 사태 국정조사를 추진하며 논란의 주범 중 하나로 민주노총을 지목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민주노총이 공공기관의 경영진을 압박해 고용세습 특혜를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한국전력 민간 위탁기업의 정규직 인력을 처우가 더 좋은 발전 자회사가 직접 고용하라는 민주노총의 요구가 있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공공기관의 한 관계자는 “민주노총이 개입하면서 정부의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도 무용지물이 되고 있다”며 “무리한 정규직화는 공공기관의 경쟁력을 갉아먹을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한재영·강광우기자 jyha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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