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부터 현재까지 단기금융업 인가를 받아 발행어음 판매에 나선 증권사는 두 곳이다. 한국투자증권이 지난해 말부터 약 4조원, NH투자증권(005940)은 지난 7월부터 1조5,000억원 규모로 발행어음을 판매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증권사 입장에서는 발행어음으로 조달한 자금을 기업 대출과 비상장사 지분 투자, 회사채 인수 등 기업금융에 활용할 수 있고 발행어음 판매로 매년 수백억원 규모의 이익을 안정적으로 얻을 수 있다. 발행어음 판매량의 1%가량이 마진으로 남기 때문에 올해 4조원가량의 발행어음을 판매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한국투자증권은 올해 400억원 정도의 수익을 더 내게 된 셈이다. 두 증권사는 초대형 투자은행(IB) 인가와 단기금융업 인가를 차례대로 받고 점차 덩치를 키우는 중이다. 하지만 발행어음을 제외하면 초대형 IB라는 이름에 걸맞은 규모와 성장동력을 갖출 환경이 전혀 마련돼 있지 않다는 불만이 끊이지 않고 있다.
금융당국은 ‘한국판 골드만삭스’를 기치로 내걸며 2011년 초대형 IB 육성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실제 초대형 IB 출범까지는 진통이 적지 않았다. 자본시장법을 개정했고 초대형 IB 선정 기준을 마련하는 데도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결국 6년이나 걸려 지난해 11월 초대형 IB 다섯 곳을 지정했다. 초대형 IB로 거듭나기 위해 증권사들은 잇따라 유상증자를 통해 몸집을 불렸다. 미래에셋대우(006800)가 자기자본 8조원을 넘겼고 NH투자증권·삼성증권(016360)·KB증권·한국투자증권은 4조원대까지 늘렸다.
그리고 다시 1년이 지났지만 초대형 IB로 지정된 다섯 개 증권사 중 단기금융업 인가를 받은 곳은 여전히 한국투자증권·NH투자증권 두 곳뿐이다. 발행어음으로 조달한 자금의 최소 절반은 벤처·스타트업 등 기업금융에 활용해 증권사가 모험자본의 공급자로 활약하도록 하겠다는 애초 취지가 좀처럼 실현되지 않고 있는 셈이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김종석 의원은 지난달 국정감사 자료를 통해 “금융위 말만 믿고 증권사들이 증자에 나섰지만 부처 간 엇박자로 아무것도 못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금융위는 당초 지난해 11월만 해도 단기금융업 인가 없이 초대형 IB로 지정되면 기업 환전 업무가 가능하다고 밝혔었다. 하지만 기획재정부가 발목을 잡았다. 단기금융업 인가를 받은 증권사만 기업 대상 외환 업무가 가능하다는 유권해석을 내놓은 것이다.
금융투자업계는 금융당국이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초대형 IB에 대해 소극적으로 돌아섰다며 비판한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지난해 7월 취임 이후부터 ‘생산적 금융’을 기치로 내걸고 혁신기업에 대한 모험자본의 공급을 꾸준히 강조해왔다. 1일에는 최 위원장 스스로 ‘2009년 자본시장법 개정 이후 가장 큰 변화’라고 자평할 정도로 ‘전면적인 네거티브화’를 표방한 혁신과제를 발표하며 자본시장 개혁에 대해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그런데 2016년 전격적으로 발표된 자본시장 개혁의 ‘원조’격인 초대형 IB만 유독 외면을 받고 있다. ‘자본시장 정책 시리즈 1호’로 1월에 발표된 코스닥 활성화 정책에는 초대형 IB 추진이 적은 비중으로나마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최근 자본시장 혁신과제에는 일언반구도 없다.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최 위원장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초대형 IB의 긍정적인 효과를 설명하고 있지만 여당 등 국회를 설득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정부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금융투자업계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다. 증권사는 지난 10년이나 법인 지급결제 허용을 주장해왔지만 번번이 가로막혔다. 현재 법인고객은 증권사 계좌를 통해 판매대금을 결제하는 등의 용도로 돈을 쓸 수 없다. 은행 계좌를 통해서만 가능하도록 규제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금융당국은 증권사의 안정성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지만 덩치가 더 작은 저축은행에도 법인 지급결제가 허용돼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한 증권사 임원은 “현재 정부는 금융투자업계를 발전시키는 데 사실상 무관심하다고 본다”며 “날개를 펴지도 못하게 묶어둔 부분이 너무 많아 한국판 골드만삭스는 어불성설”이라고 비판했다.
이처럼 정부와 금융당국·정치권의 무관심 속에서 인가를 받지 못한 3개 증권사와 중장기적으로 초대형 IB로의 발돋움을 준비해온 증권사들은 하염없이 기다리고만 있는 상황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초대형 IB 출범 전에 갖춘 담당 조직을 유지한 채 관련 제도를 연구하는 등 인가 후의 업무를 준비하고 있다”고만 밝혔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초대형 IB 출범을 통한 업계 육성에 별반 관심이 없어 보이는 정부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다.
여기에 다수의 제재 전력이 있는 외국계 금융사가 대주주 적격성 심사를 ‘무사 통과’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금융당국의 심사에 대한 신뢰 저하 논란까지 더해질 것으로 보인다. 은행 업무 성격인 발행어음을 증권사에 최초로 허용하는 만큼 지난해 신청 증권사들에 대한 심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기준보다 해석이 우선일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김용태 자유한국당 의원실 관계자는 “등록·신고에 비해 인가는 상대적으로 금융당국의 재량의 여지가 매우 크다”며 “기준과 절차적 투명성이 매우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결국 인가 주체인 금융당국의 의지에 100%가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의미다. /유주희·조양준기자 ginge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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