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그라니 익고 노르스름 물든 단풍이 과일보다 더 탐스럽다. 그 곁으로 잎 떨어진 가지가 발톱처럼 날카롭게 변해가는 가을이다. 저 멀리 깊숙한 계곡 안쪽으로 흘러가는 나룻배는 꿈결 같은 풍경 속으로 들어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다. 울창한 소나무, 운치 있는 정자와 세찬 비바람에 흩날리는 잎들이 펼쳐지는 심산 노수현(1899~1978)의 ‘사계산수도(四季山水圖)’이다. 그다지 두껍지 않은 붓으로 정성스럽게 그린 정교한 그림이지만 사실적인 생생함보다는 상상 속 풍광인 듯 이상적이다. 대상의 세세한 묘사에 치중하기보다는 문득문득 드는 인상과 감성과 의미만을 포착한 그림이라 100년 전의 그림이지만 감각적이고, 현대적이라는 느낌도 든다.
곱고도 기품있는 이 그림을, 그것도 한 점이 길이 132㎝나 되는 대작(大作)을 다섯 폭이나 그렸을 당시 노수현의 나이는 겨우 열여덟이었다. 대한제국기에 태어나 나라가 망하고 일제의 강점이 전개되던 때 그림을 배웠다. 그의 스승은 오원 장승업의 화원 화풍을 계승한 심전 안중식(1861~1919)과 소림 조석진(1853~1920)이었다. 조선왕실 도화서의 ‘마지막 화원’이던 이들은 1894년 갑오개혁과 함께 예조 산하의 도화서(圖畵署)가 해체되자 궁 밖으로 나왔다. 꼬장꼬장하던 장승업은 왜인들 보기 싫다며 명동 지나 진고개 쪽으로는 발길도 끊었다 하던, 그런 시절이다. 그렇게 도화서는 문을 닫았고 심지어 사진이 어진(御眞) 그리는 일을 대신하게 됐을지언정 왕실에서 그림이 사라질 수는 없었다. 더욱이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라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조선 미술의 유구한 전통이 사라지게 두지 않았다. 창덕궁 왕실의 지원으로 1911년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미술교육기관인 ‘서화미술회’는 조석진과 안중식을 비롯한 당대 최고의 서화가들을 교수진으로 삼았다. 여러모로 도화서의 전통적 기능을 이어받은 기구였다. 뒤이어 1915년 세워진 서화연구회는, 비교하자면 사설 미술 강습소였고 해강 김규진(1868~1933)이 거의 이끌다시피 한 곳이었다.
1899년 봄 황해도 곡산에서 3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노수현은 일찍 부친을 여의었다. 그래서 할아버지 손에서 컸다. 조부는 3·1운동 때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노헌용이다. 노수현이 보성중학교에 입학했다가 서화미술회에 들어가 미술 공부를 시작할 때도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자금 조달에 바빴다. 노수현은 스승 안중식을 특히 따랐고, 동급생 이상범(1897~1972)과 친했다. 하루는 안중식이 노수현과 이상범에게 종이 다섯 폭씩 나눠주며 춘하추동 산수화를 그려보자고 했다. 두 제자는 그간 배운 것들을 모조리 쏟아 부었다. 남종화의 멋스러움과 북종화의 섬세함이 적재적소에 자리 잡았다. 전문용어로 얘기하자면 청나라 초 사왕화법(四王畵法)이 스승에게서 제자로 이어져 그림에 담겼으니 안중식은 흡족했다. 그래서 자신의 호인 심전에서 심(心)자를 노수현에게 주어 심산(心山)이라는 호를, 전(田)자는 이상범에게 주어 청전(靑田)이라는 호를 갖게 했다. 그래서 관객이 봤을 때 10폭 짜리 병풍그림의 오른쪽 5폭에는 청전, 왼쪽 다섯 폭에는 심산의 호가 적혀 있다. 앞서 본 그림은 그중 맨 왼쪽의 세 폭이며, 노수현의 나머지 두 폭은 봄날을 그린 ‘도원도(桃園圖)’로 그림들이 하나같이 계절감각과 시적 감수성을 두루 갖췄다. 때마침 소장처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개막한 ‘대한제국의 미술-빛의 길을 꿈꾸다’에서 작품 전체를 볼 수 있다.
도화서 화원들의 작업방식을 생각한다면 ‘공동작업’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노수현과 그의 ‘서화미술회’ 동문들이 그린 또 다른 작품이 있다. 가을 햇빛을 받아 탐스럽게 반짝이는 조(粟)가 제 무게에 순응하듯 고개 숙였고 그 곁으로 아홉 개로 갈라진 하얀 꽃잎 끄트머리가 파란 구절초까지 소담하게 피어 가을 정취가 그득하다. 작품 ‘화조’의 주인공인 꽃으로 둘러싸인, 곡식만큼 통통하게 살 오른 메추라기 한 쌍이다. 메추라기는 그 자체로 풍요의 상징이다. 메추라기는 꿩과에 속하는 새인데, 꿩은 상서로운 새로 여겨져 중요한 의식에 상징적 의미로 쓰였다. 왕비의 대례복에 136쌍의 꿩을 수놓은 것도 영광과 위용, 절개와 지혜를 뜻하는 길한 상징 때문이다. 널찍한 여백에 한시가 적혀있다. “가을 들판에 조가 풍성하여/ 석양에 산새가 줄지어 쪼고있네/ 자웅을 겨룬다고 새장의 새와 싸우지 마라/ 서풍에 시들어 누더기를 입고서/ 노수현이 삼가 그리다.” 화제(畵題)로 쓴 시이나 일제강점기를 살기 시작한 젊은 화가의 고민이 괜히 시리게 느껴진다. 이 그림은 길이 121㎝, 폭 51㎝의 비단에 그려진 그림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미술관에는 이것과 같은 크기의 비단에 그려진 그림이 3폭 더 있었다. 또 하나는 독립운동가 위창 오세창의 조카 오일영(1890~1960무렵)이 그린 ‘화조도’인데 봄날 버드나무 위에 앉은 까치가 등장한다. 노수현이 자신의 화조도에 ‘노수현근사(盧壽鉉謹寫)’라고 적은 것과 똑같이 ‘오일영근사’라 적혀 있다. 여기서 ‘근사’는 ‘삼가 그리다’로 해석되는 동시에 높은 사람에게 바치기 위해 그려졌다는 뜻을 품고 있다. 같은 크기의 또 다른 새 그림은 황제의 어진화가로 발탁되기까지 했으나 후에 친일한 이당 김은호(1892~1979)의 ‘송학도’와 ‘노안도’이다. 붉은 태양을 가로지르는 소나무 위 학 두마리가 우아하고, 노년의 평안함을 상징하는 갈대와 기러기가 따뜻한 그림들이다. 송학도에도 ‘김은호근사’라 적혔는데, 결정적으로 ‘노안도’의 날고 있는 기러기 아래로 ‘경신(庚申) 가을에 김은호근화(謹畵)’라고 쓰여있다. 이를 통해 경신년인 1920년에 그린 것이라는 게 확인됐다. 김은호와 오일영은 노수현과 ‘서화미술회’ 동문들이니 황실에 헌상할 목적으로 그려진 것임을 추론할 수 있는 그림들이다. 이 그림도 ‘사계산수도’와 함께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전시 중이다.
한편 노수현이 한창 서화미술회에서 그림을 배우던 1917년 11월, 창덕궁 대조전에 불이 났다. 순종이 내전 재건공사를 지시했고 햇수로 3년을 넘긴 1920년에야 끝났다. 공사 마무리 단계에 이르니 대조전과 희정당, 경훈각의 벽화 제작이 필요했다. 이왕직의 일본인 관리들은 일본 화가를 추천했지만 왕실은 안방의 그림까지 그들에게 내주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조선인 화가를 공개적으로 모집했다. 순종의 응접실이던 희정당 벽화는 서화연구회를 이끌며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관을 운영하기도 했던 김규진이 그렸다. 창덕궁의 침전인 대조전과 경훈각은 오일영·김은호·이상범·노수현·이용우 등 서화미술회의 신진들이 맡았다.
왕실에서는 창덕궁 벽화를 대청 윗부분 벽 전체를 뒤덮는 형식으로 주문했다. 파격이었다. 노수현은 이상범과 함께 경훈각을 맡았다. 왕실 여성들의 처소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경훈각이다. 둘은 중국 전설을 소재로 신비롭고도 환상적인, 동양적 낙원의 분위기를 그렸다. 훗날 대가가 된 이들의 팔팔 뛰는 청년기 작품이자 가장 큰 그림이다. 스물 한 살의 노수현은 경훈각 동쪽벽을 천도복숭아 든 공자가 등장하는 ‘조일선관도’로 꾸몄다. 사선 구도로 시선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가며 집, 나무, 산, 바위, 인물 등을 하나하나 살펴볼 수 있다.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고 추켜세우면서 전통화법을 따르되 서양과 일본의 최신 화법까지 가미해 개량을 통한 새로운 모색까지 그림에 담았다. 노수현과 그의 동료들이 그린 조선의 마지막 궁궐 벽화는 나라의 자주성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와중에도 끝까지 지키고픈 자존심이고 자부심이었다.
훗날 노수현은 동아일보에서 삽화를 그렸고 조선일보에서 ‘멍텅구리 헛물켜기’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연재 만화가로 활약한다. 꼿꼿했던 그도 나중에는 친일매체에 ‘운전이라도 배워서 전쟁에 나가 나라를 도와야 한다’는 취지로 ‘멍텅구리-운전수편’을 발표하는 등 흠을 새겼다. 그의 평생 친구 이상범도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살사건을 이끌었으나 후에 친일했듯, 심란한 시절이었다. 광복 후 노수현은 서울대 미대에서 후진을 양성하며 전통을 계승했고, 10대가·6대가·4대가로 꼽혔다. 시절이 암흑기였건만 오히려 어두워서 더 빛나는 그림들을 남겼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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