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雪) 속으로 내몰렸다. 하염없이 흩날리는 눈이 온 세상을 뒤덮어 어느덧 여기가 어디인지, 시간은 얼마쯤 지났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방 천지 분간이 안 될 처지라 눈을 치워도 봄 직하나, 치우고 밀어낸 자리에는 이내 눈이 내려앉으니 기울이는 노력은 허사가 되고 만다. 망연자실의 순간에, 오히려 이 눈발 속에 온몸 던지고 맡기기로 했다. 벗어나지 않고도 찾은 탈출구다. 아니 탈출을 포기하니 문이 열렸다. 눈 쌓인 몸뚱이는 눈사람처럼 변해가고, 내가 나인지 눈인지 혹 눈이 나인 것은 아닌지 어지러운 마음이 어느덧 하나로 귀결된다. 한기(寒氣)로 뻣뻣해진 몸을 압도하며 정신은 더욱 또렷해진다. 겉은 눈으로 다 뒤덮여 가리워졌을지언정 내 안의 존재감은 확고함으로 느껴진다. 박서보(87)가 ‘묘법’을 그릴 때의 심정도, 행위도 꼭 눈밭의 사투 같았다. 사람이 아무리 애쓴다 한들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막아내겠는가. 부인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자연 앞에서 그는 자신을 버리고 그리려는 의지도 내려놓은 채 그저 몸을 맡겼다.
작품에 대한 설명보다 화가와 그 아들의 일화를 들어보는 게 먼저다. 홍익대학교의 젊은 교수가 된 박서보는 개혁에 앞장서다 미운털이 박혔고 결국 학교에 사표를 내고 만다. 졸지에 백수가 된 그가 집에 틀어박혀 노자와 장자를 벗 삼아 책만 끼고 뒹굴던 시절, 1967년의 어느 날이다. 네 살이던 둘째 아들은 다섯 살 위 형의 공책이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연필을 움켜쥐고, 방안지 칸에 맞춰 글자를 흉내 내 적어보려 하건만 쉽지 않았다. 삐뚤어지고 줄 밖으로 튀어 나간 꼴이 못마땅했던지 지워보려 했지만 지우개질조차 서툰 손에는 버겁다. 무엇 하나 뜻대로 되는 것 없었던 아이는 화가 났는지 종이 위에 마구 연필을 휘갈겼다. 종이에 그어댄 아이의 연필질은 “관둬, 나 안 할래”를 외치는 체념의 몸짓이었고 이를 본 화가 아버지는 “비움을 화폭에 구현할 방법”을 깨우쳤다.
이때부터 시작된 박서보의 ‘묘법(描法·Ecriture)’ 연작은 꼬박 반세기로 이어졌다. 캔버스에 칠한 희끄무레한 바탕색은 새하얗지도 않은 것이 눈이나 안개같고 희뿌연 먼지나 잿빛을 닮기도 했으며 때로는 칠흑같은 밤처럼 보인다. 화가는 연필이나 뭉툭한 도구를 이용해 바탕 위에 재빨리, 반복적으로 선을 그었다. 물감이 마르기 전에 모두 완성해야 했기에 한 번 시작한 작업은 끝날 때까지 멈출 수 없었고 숨 막힐 듯한 극한의 작업은 역설적이게도 관람하는 이에게 숨 쉴 틈을 열어준다. 허여멀건하고 딱히 그렸다고 할 만한 게 없어 보이는 그의 작품은 세계적 명품이 됐다. 지난해 홍콩 크리스티경매에서는 연필로 그린 ‘묘법 No.10-79-83’이 1,026만 홍콩달러(약 14억7,000만원·수수료 포함)에 팔려 작가의 세계 경매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작가가 1982년 전시 때 300만원에 내놓고도 잘 팔리지 않은 작품이, 2000년대 미술시장 호황 때도 3,000만원 정도이던 것이 15억 원 수준으로 올랐으니 30여 년 만에 500배의 가치가 발굴된 셈이다.
박서보는 193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때 형이 쓰던 말라붙은 물감에 뜨거운 물을 부어 그려 낸 포스터가 전국 1등상을 받으며 그림에 애정을 갖게 됐다. 이당 김은호의 ‘미인도’를 똑같이 따라 그려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묘사력이 좋았다. 대를 이어 법률가가 될 줄 알았던 아들이 ‘환쟁이’ 된다는 소리에 보름이나 몸져누운 아버지를 두 번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는 ‘세계적 화가’가 되고자 했다. 하지만 홍익대 입학하던 그 해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일제 치하의 핍박과 전쟁의 고통을 겪은 그는 울분을 화폭에 담았다. 유럽 앵포르멜(Informel·즉흥적 행위와 격정적 표현을 중시한 추상미술)의 영향으로 분류되는 그의 초기작 ‘원형질’은 어두운 색조의 찐득한 추상 속에 비극적인 한국 근대사의 현실을 투영했다.
박서보는 늘 당당했고 좀 남달랐다. 1955년 겨울 대학 졸업 후 충남 수덕사로 찾아갔다. 나혜석과 함께 1920년대 신여성을 대표하는 문인이자 승려인 김일엽(1896~1971)을 만나 ‘끝장토론’을 해보고 싶었다. 당찬 젊은 화가는 “어떻게 좋은 예술가가 되겠습니까” 물었고 김일엽은 수신(修身)하라, 비우라 선문답을 이어갔다. “불상 놓고 불경하는 게 싫으면 강가의 돌을 주워다 ‘박서보’ 이름만 외워보시오. 백 번도 채우지 못하고 상념이 떠오를 것이오. 그렇게 반복하다보면 비워집니다.” 그 말 들은 박서보는 “그리하여 당신은 부처님을 자주 만나십니까” 또 물었고 “자주 만나는데 만나보니 그게 나더라”는 대답을 가슴에 담았다. 그때부터 십 수년간 ‘비움의 미학’은 작가의 머리를 맴돌았고 훗날 아들의 연필질에서 깨우침이 되어 ‘묘법’으로 이어졌다.
그런 박서보의 작품은 그렸다기보다는 긋고, 새겼다 하는 게 옳고 더 따지자면 그리는 행위를 지워낸 결과물이다. 초기 묘법이 일명 ‘연필 묘법’으로 불린다면 1980년대 묘법은 ‘지그재그 묘법’으로 확장된다. 한국 고유의 수제 닥종이를 물에 적셔 불린 다음 여러 겹 올리고 이 위에 물감을 칠한 다음 마르기 전에 긁어냈다. 양 손가락으로 벽을 긁듯 일정한 길이와 간격의 선들은 이리저리 엇갈리며 지그재그를 긋는다. 여기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고, 이 안에 살아 꿈틀대고 이리 뛰고 저리 달려들어 보는 생명력과 의지가 있다는 것을 외치는 듯하다. 그 대표작 중 하나가 서울중앙지검 청사 로비에 걸린 먹색 ‘묘법 No.890830’이다. 가로 폭이 6.8m, 세로 길이가 3m에 달하는 대형 작품이라 벽면 하나를 통째 차지했다. 긁고 또 긁어내며 묵묵히 파고드는 형태가, 그러면서도 곳곳에 펄떡이며 드러낸 존재감이 진실에 닿으려는 고집스러운 인내로 읽히는 작품이다.
박서보가 좌우명처럼 자신에게, 그리고 그의 제자들에게 늘 하는 말이 있다. “변화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그러나 변하면 추락한다.” 그래서 ‘묘법’으로 수십 년 작업하면서도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했다. 최근작은 한지를 불리고 붙여서 겹쳐 놓은 자리를 연필같은 도구로 일정하게 밀어내 선을 만든다. 비우고 비워낸 자리는 골이 패이고 밀리고 밀려난 자리에 한지가 소복이 쌓여 이랑을 이룬다. 밭 가는 농부의 마음이 담긴 작품 안에서 새로운 생명의 씨앗이 터져나올 것만 같다.
박서보는 자타공인 ‘단색화’의 대표작가다. 1970년대에 등장한 단일한 색조의 그림은 ‘한국적 모노크롬 회화’라 불리기 시작했고 지난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의 단색화’전 이후 국제 미술시장에서는 ‘단색화’로 통한다. 사실 단색화라는 명칭은 색에 방점이 찍혀있기에 박서보의 지향점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 단색화가 처음 주목받은 1975년 일본 동경화랑의 전시에서 ‘백색의 미학’이 부각된 게 계기였던 탓이다. 박서보 자신은 “행위의 무목적성과 반복성”를 강조한다. 중국 상하이 파워롱미술관에서 한창인 ‘한국의 추상미술:김환기와 단색화’에서는 맨 첫머리에 놓인 그의 작품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페로탕 갤러리는 박서보의 근작들로 뉴욕 전시장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 영국화랑으로 세계적 영향력을 자랑하는 화이트큐브 갤러리는 1967년부터 1976년까지의 초기 묘법을 집중적으로 모아 홍콩에서 전시를 열었다. 지난 11월에만 대륙과 대양을 넘나들며 주목받은 박서보는 내년 5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첫 대규모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 말 그대로 ‘살아있는 신화’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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