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와 올해 건의된 내용 중 시급하다고 판단한 것만 80건입니다. 과거부터 요청해온 규제개선 과제는 수백 건이 넘습니다. 건의해도 반영률은 10% 미만이라 기업들이 체감하기는 어렵습니다. 규제개혁이야말로 저성장을 뚫을 해법인 만큼 정부가 기업들의 호소에 귀를 열어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 대표 연구기관 중 하나인 한국경제연구원이 규제개선 과제 80건을 국무총리실에 전달한 것은 규제가 혁신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위기감이 크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가 저성장 국면에 진입하면서 일자리 부족, 실업률 상승 등은 더욱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한국은행과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 경제의 평균 성장률은 매년 2~3%로 굳어지고 있고 실업률은 지난해 3.7%를 기록하며 지난 2010년 금융위기 당시와 유사한 수준이다.
한경연은 건설·입지 분야의 24건을 비롯해 △에너지 13건 △금융 9건 △교통 6건 △공공입찰 6건 △환경 5건 △관광 3건 △방송 2건 △공정거래 2건 △기타 부문 10건 등을 개선 과제로 언급했다. 유환익 한경연 혁신성장실장은 “제조업 성장이 둔화되고 수출실적이 하락하는 상황에서 기업들에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는 규제 완화가 절실하다”며 “핀테크·헬스케어·친환경자동차 등 4차 산업혁명 관련 분야에서 기업의 성장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상식적 규제로 사업 효율성 저하=한경연이 국무총리실에 전달한 기업 애로사항을 보면 ‘비상식적 규제’가 사업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국제선 항공기는 국내에서 운항할 수 없게 한 것이 대표적이다. 현재 관세법 및 항공사업법에 따르면 예컨대 일본 오사카에서 김포국제공항으로 가려던 비행기가 기상악화로 부산에 내릴 경우 승객들은 이 비행기를 타고 김포로 갈 수 없다. ‘외항기’인 만큼 승객들은 또 다른 ‘내항기’로 갈아타야 한다. 기존의 외항기는 승객들이 실어뒀던 짐만 그대로 가지고 김포로 이동할 수 있다. 내항기로 전환하려면 외국화물을 세관에 신고한 후 다시 실어야 하는 규정 때문이다. 한경연 관계자는 “기상악화 등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 외항기가 최초 목적지로 이동할 수 있게만 해줘도 이용객의 불편함이 크게 줄고 빈 여객기로 운항하는 항공사의 손실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복잡한 보험금 청구절차 역시 구시대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현재 의료법 및 보험업법은 보험금 청구 목적의 의무기록 전송조차 허용하지 않고 있다. 보험 가입자가 보험회사에 보험금을 청구하려면 직접 병원에 방문해 관련 서류를 받고 이를 팩스 등으로 보내야만 한다. 보험회사 역시 손해 규모를 파악하려면 일일이 보험가입자를 만나야 한다. 최근 핀테크 기술 발전으로 개인정보 유출 우려가 크게 낮아졌음에도 여전히 ‘오프라인’ 방식을 고수하는 법령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뒤떨어진 제도·과도한 규제로 기업가 정신 퇴조=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의 평가에 따르면 올해 기준으로 기업 관련법 부담지표의 한국 순위가 61개국 중 47위로 나타났다. 세계경제포럼(WEF)이 올해 발표한 정부 규제 부담지표도 138개국 중 한국이 79위였고 경제자유지수 중 규제지수는 159개국 중 75위를 기록했다. 우리 기업인들이 낙후된 법적·제도적 환경에서 경영을 이어가고 있다는 얘기다.
특히 한경연은 신산업 관련 규제를 꼭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공지능(AI)·빅데이터·자율주행차 등 4차 산업혁명 대응을 위해 포지티브 규제 체계의 수정이 필수적이라는 설명이다. 대표적으로 수소자동차의 보급을 위해서는 도심지 내 수소충전소 확보가 필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국토교통부는 수소충전소와 주택 간 거리를 50m로 두고 있다. 천연가스 충전소 규정(25m)보다 강화된 제한 조건을 둔 것이다. 기업인들이 수소충전소 부지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만큼 이격거리의 조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보험회사가 핀테크 자회사를 소유하거나 투자할 수 있는 근거 조항 마련이 시급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금융회사가 사물인터넷(IoT)·블록체인 업체와의 협업으로 기술 역량을 높여야 함에도 현재 단순 전산시스템 정도에만 투자할 수 있는 실정이다. 지주회사가 증손회사를 보유할 경우 100%의 지분율을 확보해야 하는 규정도 완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대기업과 벤처기업 간의 합작회사 설립을 통해 사업다각화를 할 수 있지만 과도한 비용 부담으로 포기하는 기업이 많은 것으로 전해졌다. 한경연 관계자는 “4차 산업혁명의 유망 분야인 헬스케어도 개인정보보호 규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서 “보험사가 피보험자의 건강정보를 활용해 보험료 할인 등을 수시로 제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희철기자 hcsh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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