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4년 3월 광주고등법원이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의 비자금 조성과 탈세 의혹에 대해 254억원의 벌금형을 결정했다. 또 벌금 254억원에 대해 1일당 5억원의 환형유치 노역 판결도 내렸다. 허 전 회장은 벌금을 낼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받은 뒤 하루에 5억원의 벌금을 탕감받는 조건으로 노역을 담당한 것이다. 하지만 재산 은닉 의혹이 불거지면서 노역은 며칠 만에 중단됐다. 다만 이미 노역장에서 일한 만큼 하루 5억원꼴로 벌금을 탕감받을 수 있었다.
이처럼 고액벌금을 고의로 납부하지 않고 단순노역 업무를 통해 하루에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에 달하는 벌금을 탕감받는 사례가 이어지면서 벌금형 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논의가 다시 시작돼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 벌금형에 대한 재판 결과가 전체의 30%를 유지하고 있지만 미납에 따른 노역장 유치 제도가 허점투성이라는 비판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여전히 가능한 황제노역=재판부가 벌금 판결을 확정하면 30일 이내에 납입해야 한다. 재판부는 만일 벌금을 납입하지 못할 경우 벌금 납부를 대신해 1일 이상 3년 이하의 범위 내에서 노역장에서 작업에 복무할 수 있는 기간도 명시한다. 이른바 환형 처분, 노역장 유치 제도다. 문제는 환형 처분이 오로지 판사의 재량에 따라 정해질 수밖에 없어 판사에 따라 1일 노역장 유치에 대한 벌금 환산금액이 크게 달라진다는 점이다. 법으로 명확하고 구체적인 기준이 마련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에 따라 국회는 2014년 5월에 벌금이 △1억~5억원 미만일 경우 300일 이상 △5억원 이상~50억원 미만은 500일 이상 △50억원 이상인 경우 1,000일 이상 유치 기간을 정하도록 형법을 개정했다. 그러나 여전히 1일 노역으로 탕감되는 벌금액의 상한선을 두지 않아 고액벌금 미납자들이 노역장 유치 제도를 악용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의 경우 8월 2심 재판에서 각각 징역 25년과 20년에 벌금은 같이 200억원을 받은 만큼 만일 법상 최대치인 3년 동안 노역장 유치에 처해진다 해도 하루 일당 1,826만원의 벌금을 탕감받는 노역이 가능해진다.
◇범죄 감염 가능성 높은 노역장=벌금형은 당초 비교적 가벼운 범죄에 대해 징역형의 단점인 범죄 감염과 낙인 효과를 방지하는 차원에서 대안으로 도입된 것이다. 아울러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산 박탈을 통해 범죄 억지력과 예방 효과를 높여 징역형에 상응하는 형벌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점에서 적용된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러나 실제 노역장 유치자의 현황을 살펴보면 2017년 기준으로 전체 노역자(2만1,814명) 중에서 12.8%에 이르는 2,778명이 30세 미만의 젊은 층이다. 이들은 노역장 유치를 통해 교도소 문화를 경험하고 범죄자 집단과 친분을 형성하거나 소액벌금 미납으로 노역장을 경험해 부정적 자아를 형성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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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경제적 약자의 경우 법원이 징역형을 피하려고 벌금형을 선고했는데 돈이 없어 다시 노역장 유치를 통한 징역형으로 환원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경미한 범죄로 소액벌금을 선고받은 뒤 경제적 사정에 따라 벌금을 납부하지 못한 사람은 노역장 유치에 처해지고 다시 경제적 기반이 박탈되는 악순환에 이르는 경우도 많다는 게 문제다. 실제 노역장 유치 건별 선고벌금액 분포를 살펴보면 지난해(전체 4만9,055건)의 경우 300만원 미만이 70.5%에 달하고 100만원 미만도 27.8%에 이른다.
◇부처 간의 여전한 이견=이에 따라 올 초 법제처는 황제노역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 여론을 감안해 법무부에 형법 개정을 권고했다. 정부 내 최고 법률해석기관인 법제처가 형법에서 노역장 유치 기간을 3년으로 정해 오히려 벌금액이 고액일수록 노역장 유치 1일당 벌금액수가 높아지는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법제처는 이와 관련해 “현행 형법 69조 2항은 벌금을 납입하지 아니한 자는 1일 이상 3년 이하의 기간 동안 노역장에 유치해 작업에 복무하게 하도록 하고 있는 바 벌금액이 고액인 경우 벌금액수에 따른 불합리한 차별은 여전히 남아 있게 된다”면서 “노역장 유치 기간을 상향하거나 벌금액이 일정액을 초과하는 경우에는 노역장 유치만으로 벌금액 전부가 탕감될 수 없도록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법무부는 “소위 황제노역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노역장 유치 기간을 세분화하는 내용의 형법 개정이 이미 이뤄졌다”며 “상한 상향 시 고액벌금의 경우 노역장 유치가 벌금 집행 확보를 위한 간접적 수단이 아닌 추가적 징역형으로 기능할 수 있는 만큼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반대했다.
황제노역에 대한 법무부의 대응에 법조계 안팎에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변호사는 “법무부는 ‘고액벌금의 경우 노역장 유치가 벌금 집행 확보를 위한 추가적 징역형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우려했지만 현실은 벌금형 판결을 받은 많은 사람이 노역장에서 하루 10만원꼴로 벌금액을 탕감받으며 생활해 추가적 징역형으로 변질된 지 오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별취재반=탐사기획팀(안의식팀장 정두환선임기자 김상용기자 이지윤기자) 사회부법조팀(김성수선임기자 안현덕기자 윤경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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