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카펫 위에 건장한 사내가 총 맞은 채 쓰러져 있다. 금발 머리와 얼굴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흡사하다. 그를 향해 총을 겨눈 이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다. 영화적 상상력을 동원한 패러디지만 섬뜩하다. 카펫 주변으로 달러화 지폐들이 흩어져 있고 ‘은닉된 재산(Concealed products)’이라는 제목 옆으로 20개의 정치 풍자 영상작업들이 펼쳐진다. 각각의 영상들은 컴퓨터 자수를 통해 G20 국가 대표들의 이미지를 만들고 그들의 연설이 뒤엉켜 혼탁한 상황이 연출된다.
파격적이고 적나라 한 전시의 주인공은 조각가 임영선이다. 그의 개인전 ‘원.존.이(ONE. ZONE. E.)’가 12일 개막해 오는 20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제2전시실에서 열린다. 가천대 교수로 재직중인 작가가 지난 2000년 일민미술관 전시 이후 18년 만에 여는 개인전이다. 전시 제목은 “입구와 출구가 하나라는, 유일한 길이라는 의미”이며 “조각 미술전시의 형식을 과감하게 탈피해 사회현상과 미디어의 다양한 해석의 새로운 은유와 서사적인 전시를 기획했다”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인물 조각과 사실적 표현력으로는 국내 최고 수준의 실력파로 꼽히는 임 작가는 특유의 묘사력으로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유명 정치인 패러디를 선보였다. 이와 함께 민족문제로 희생된 어린아이, 이름 없이 살아가는 노동자들을 비롯한 익명의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모래 위에 설치된 어린아이 형태의 조각상은 2년 전 터키해안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6살의 시리아 난민 크루디 모습을 재현한 것. 제목은 ‘너희 이웃을 너의 몸같이 사랑하라’로 붙였다. 백자로 제작한 50여 개의 남녀노소 두상은 내부에 설치된 LED조명에 의해 은은한 빛이 흘러나온다. 작가는 “지나간 역사에서 사라져간 민초들의 얼굴들을 재현한 것인데, 얼마 전 지병으로 작고한 작가의 아내 두상도 포함돼 있다”면서 “아픈 시간의 흔적들을 통해 현재의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 보는 침묵의 공간”이라고 말했다.
눈과 함께 귀도 솔깃한 전시다. 입구에 설치된 대형 황금색 조각을 지나면 센서가 반응해 힘찬 행진곡이 연주되고, 안쪽 영상 작품의 후반부에는 퀸의 프레디 머큐리가 부르는 ‘쇼 머스트 고 온(The show must go on)’이 흐른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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