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의 본격적인 무역협상을 앞둔 시점에 나온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개혁개방 40주년 연설은 전 세계에서 쏟아진 관심에 비해 밋밋하고 원론적인 수준에 그쳤다는 평가가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와의 무역협상을 의식해 시장개방과 개혁을 약속하면서도 중국이 미국에 굽히고 들어간다는 인상을 주지 않고 자존심을 지키며 내부적 지지와 결속을 꾀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온 고민의 결과로 풀이된다.
18일 시 주석의 연설은 개혁개방 40년의 성과에 대한 중국의 자부심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1시간30분 가까이 이어진 그의 연설은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도입한 지 40년 만에 세계 2대 경제강국이자 세계 최대 무역국, 최대 제조강국으로 성장했다는 자찬으로 점철됐다. 시 주석은 “개혁개방은 중화민족 발전 역사상 위대한 혁명이며 이 때문에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업이 비약했다”면서 “중국 공산당 설립,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개혁개방과 중국 특색 사회주의 추진은 3대 역사적 사건이자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는 3대 이정표”라고 찬사를 늘어놓았다. 개혁개방에 박차를 가해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이 되는 오는 2021년까지 전면적 샤오캉(풍족하고 편안한) 사회를 건설하고 신중국 건국 100주년인 2049년까지 세계 최강 사회주의 대국으로 도약하겠다는 ‘두 개의 백년’ 중국몽을 언급할 때는 장내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시 주석은 최근 미국과의 무역갈등과 90일간의 한시적 무역협상을 의식한 듯 적극적인 개방 의지를 드러내는 등 유화적 메시지를 내놓으면서도 다자무역체제에 대한 지지와 패권주의에 대한 반대 의지를 드러냈다.
시 주석은 “중국의 발전은 세계를 떠날 수 없으며 세계도 번영을 위해 중국이 필요하다”며 “중국은 적극적인 개방정책을 통해 전면적인 개방구조를 형성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의지를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 되며 타국의 내정 간섭과 강자임을 믿고 약자를 깔보는 것을 반대한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일방주의적 횡포를 에둘러 비판했다. 시 주석이 “중국의 발전은 어떤 국가에도 위협을 주지 않을 것이고 중국은 영원히 패권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한 대목도 사실상 트럼프 대통령의 대중 압박을 겨냥한 것으로 풀이된다.
당초 외신들은 트럼프 대통령과 휴전 중인 시 주석이 이날 연설을 통해 90일간의 무역협상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한 상당한 대미 양보안을 내놓지 않겠느냐고 기대했지만 막상 시 주석의 연설에서 구체적인 시장개방 조치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사실상 원론적으로 개방을 강조하는 ‘말잔치’ 수준에 그친 것이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중국은 미국에 상당한 양보를 해야 하지만 이것이 나약한 모습으로 비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며 “지나치게 양보했다는 인상을 주면 국내 정치에 악영향을 줄 것으로 우려한다”고 전했다.
오히려 이날 기념행사는 사실상 시 주석의 절대권력을 재확인하는 자리가 됐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날 경축식에는 리커창 총리 등 정치국 상무위원들과 왕치산 국가부주석 등 중국 지도부가 모두 참석했으나 후진타오와 장쩌민 전 국가주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향후 개혁개방 확대 정책에서 중국 공산당이 그 중심에 있을 것임을 재확인하면서 개혁개방 확대 과정에서 4개 의식을 강화하고 4개 자신감을 확고히 견지할 것을 주문했다. 4개 의식은 시진핑 신시대 사상의 핵심으로 시 주석에게 절대복종을 요구하는 정치·대국(大局)·핵심·일치를 의미한다. 당원들의 초심을 강조하는 4개 자신감에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노선·이론·제도·문화 분야에서 공산당이 자신감을 갖고 개혁개방 노선을 관철시키겠다는 뜻을 담았다. 중국중앙TV(CCTV) 등 중국 매체들은 시 주석의 연설내용과 ‘개혁의 리더’로서의 시 주석의 성과를 대서특필하며 ‘시 주석 띄우기’에 나섰다.
다만 이 같은 시진핑 신시대 사상의 재강조가 오히려 미중 무역분쟁 속에서 중국 내부의 갈등을 더욱 부추기고 위기의 싹을 키울 수 있다는 지적이 많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견과 갈등을 숨기고 있기는 하지만 무역전쟁의 여파로 중국 경제와 사회 곳곳에서 시 주석의 절대권력과 독단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스티브 창 영국 런던대 중국연구소 소장은 “미중 무역갈등이 격화하며 중국 경제 둔화가 뚜렷해지면서 시 주석의 정치력과 통치 방식에 대한 반대 의견과 불만이 정치권 내부에 적지 않다”고 진단했다.
/베이징=홍병문특파원 hb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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