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의 열차 출발 방해로 출발이 11분 지연되었습니다.’
지난 13일 한바탕 실랑이 끝에 간신히 오전 10시5분 출발 창원중앙역행 KTX에 올라탄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는 3시간여 승차시간 내내 객차 모니터로부터 질책을 당했습니다. ‘고객’이라 쓰였지만 ‘죄인’이라 읽히는 낯뜨거운 광고에 다른 승객들의 매서운 눈초리가 뒤통수에 그대로 꽂히는 기분이었죠.
박 대표에 따르면 당일 오후 2시 경남 창원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아침 7시부터 장애인콜택시를 수소문했지만 잡히지 않아 두 시간을 기다린 끝에 일반 택시를타고 9시54분 서울역에 도착합니다. 2층 종합안내소 도착 시간은 57분, 열차 출발 8분 전이었죠. 그는 휠체어 전동리프트 탑승 지원을 요청했지만 역무원은 15분 전에 오지 않았다며 다음 열차(12시50분)를 타라고 지원을 거부했습니다. 마음이 급해진 박 대표는 재차 도움을 요청한 뒤 서둘러 플랫폼으로 이동해 좌석이 있는 2호차 앞에서 섰습니다. 바로 옆에 리프트도 있었죠. 이때 시간은 10시 1분. 그러나 서울역에 그 누구도 따라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안보이던 직원들이 철도경찰과 함께 나타난 건 그가 어떻게든 타겠다며 열차에 매달린 뒤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박 대표를 태운 열차는 10시16분에야 출발했습니다. 실제 리프트를 이용한 시간은 채 1분 남짓이었습니다.
더 일찍 오지 않은 박 대표를 탓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코레일이 그의 탑승을 도왔다면 열차는 충분히 제시간에 출발할 수도 있었습니다. 설사 승객 잘못이 커도 공개적으로 열차 내 망신주기식 광고 문구를 넣은 건 지나치다는 비판도 쏟아집니다.
지난 28일 박 대표는 서울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장애인은 출발 15분 전 도착 시 탑승 가능’ 규정은 차별행위”라고 주장했습니다. 코레일이 전담인력을 배치하거나 동선을 개선하는 등 다른 조치가 가능한데도 자의적으로 15분을 설정해 열차 이용을 제한한다는 것입니다. 또 차내 질타 광고에 대해 코레일 대표의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이날 장애인단체들은 서울역에서 실측도 벌였습니다. 서울역 안내소에서 플랫폼 열차 앞까지는 대략 4분30초가 걸렸습니다. 리프트를 이용해 열차에 오르는 데는 1분 30초 정도 소요됐습니다. 코레일이 15분 전이라고 안내하고 있다지만, 물리적으로 2분 전에 플랫폼에만 온다면 열차를 못 탈 일도 아닌 셈입니다.
물론 코레일도 할 말은 있습니다. 우선 코레일의 장애인 열차 이용 규정을 살펴볼까요. 원칙적으로 장애인은 30분 전 승·하차도우미 서비스를 신청하고 15분 전 안내장소에 도착해야 합니다. 직원을 제때 투입해야 하고 장비 가동 등에 여유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러나 장애인단체는 반론을 제기합니다. 우선 표를 예매하면 코레일에서는 해당 열차에 장애인이 타는지 안타는지 충분히 미리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산상 장애인 좌석이 팔리면 해당 열차에 승하차 서비스 소요가 생기는 점이 예고되는 만큼 굳이 사전 신청을 하지 않더라도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이죠. 이렇다면 30분전 신청, 15분 전 안내소 도착이라는 선결 조건이 없더라도 해당 객차 앞에만 미리 도착하면 된다는 얘깁니다. 이를 토대로 장애인단체는 코레일 규정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하기로 했습니다.
장애인이 언제까지 도착해야 하는지는 조금 더 사회적 합의와 개선 방향에 대한 검토가 필요해 보입니다. 사유가 어떻든 승객의 잘못을 객실모니터로 계속 표출한 부분은 공공기관인 코레일이 할 일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2년 전 뉴스가 떠오르는 건 왜 일까요. 2016년 3월 당시 황교안 국무총리는 부산행 KTX에 탄다며 관용차를 플랫폼까지 몰고 갔습니다. 이를 두고 ‘황제 의전’ 논란이 일었죠. 국무총리 앞에서 부처 산하기관인 코레일이 넙죽 엎드릴 수 밖에 없는 건 별다른 도리가 없긴 합니다만, 15분전에 안오면 열차 승차를 돕지 않는다는 장애인과 견줘보면 씁쓸함이 남습니다. 역시 권력인 건가요.
또 하나 더 있습니다. 두 달 전 코레일은 청년체험형 인턴 1,000명을 뽑았는데요 아주 특이한 일자리 쪼개기 방식이 동원됩니다. 고객안내 분야 900명을 주중반일제(553명)와 주말집중형(347명) 방식으로 뽑았는데요 반일제 인턴은 하루 근무가 무려 11개 조로 나뉘어 하루 4시간만 일합니다. 사실상 ‘단기 알바’와 다름없는 근무 형태인데 고용인원을 부풀리려는 꼼수라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1주일에 1시간만 일해도 통계에는 취업자로 잡히기 때문이죠. 억지로 인력을 뽑았는데, 장애인을 위한 배치를 좀 더 하면 사전 준비시간을 줄일 방법도 있지 않을까요.
이번 사건을 두고 장애인이 과도했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다른 승객의 시간을 볼모로 잡았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건이 터져야만 정부나 공공기관이 움직이는 것도 엄연한 사실입니다./임진혁기자 liberal@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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