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감정평가사들에게 공시지가 산정에 구체적인 참고가격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져 과도한 개입 아니냐는 논란이 커지고 있다. 국토교통부의 담당자가 감정평가사들에게 고가 주택·토지의 공시가격을 한꺼번에 올리라는 ‘구두지시’를 내린 것에 이어 일반 표준지에 대해서도 ‘공시참고가격’을 제시해 공시지가 조정을 시도한 것으로 확인되면서다.
4일 업계에 따르면 국토부는 지난해 말 전국 표준 단독주택 공시가격과 표준지 공시지가를 각 토지 및 주택 소유자에게 통보하고 현재 의견청취를 진행하고 있다. 표준 단독주택의 경우 오는 7일까지 이의신청을 받은 후 중앙부동산가격공시위원회의 검토를 거쳐 25일 공시된다. 표준지 공시지가는 이달 15일까지 의견 접수를 받고 다음달 13일 공시될 예정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국토부는 3.3㎡당 1억원이 넘는 고가 토지뿐 아니라 일반 토지에 대해서도 ‘공시참고가격’을 부여해 가격을 조정을 시도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민간 전문가로 구성된 감정평가사들의 반발이 커지자 고가 토지에만 ‘중점관리토지’라는 이름을 붙여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공시참고가격은 국토부 산하 기관인 한국감정원이 만든 것으로 사실상 감정평가사들에게 정부가 정한 가격에 공시지가를 맞출 것을 강요한 셈이다.
이뿐 아니라 고가 토지 공시지가에 대해서도 일종의 ‘마사지’를 시도했다는 비판도 확산하고 있다. 국토부 관계자가 지난해 12월 중순 열린 한국감정원의 지가공시협의회 회의에 참석해 감정평가사들에게 고가 토지에 대해 “공시지가의 시세반영률을 한 번에 70~80% 선으로 끌어올리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이에 일부 감정평가사들이 우려를 나타냈고 국토부 관계자가 1회 상승률을 100% 정도로 맞추면 될 것이라고 얘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업계에서는 과도하게 부동산 감정평가 업계에 개입했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세금 부과 및 각종 행정사무에 연계되는 공시지가를 정부의 입맛대로 산정했다는 지적이다.
국토부는 책임이 산하 기관에 있다며 한 발 빼는 모습이다. 국토부 관계자는 “‘공시참고가격’ 제시 여부는 국토부와는 무관한 일”이라면서 “한국감정원에서 관련 자료를 만들었고 추후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보고받았다”고 했다.
‘구두지시’ 논란과 관련해서는 ‘개입’이 아닌 정당한 권한 행사라는 입장이다. 국토부는 이날 참고자료로 “공시지가 조사 업무를 감정평가사에게 의뢰하면서 정부의 정책 방향을 설명하고 공시가격의 적정성 여부를 검토할 수 있는 권한이 정부에 있다”고 했다.
이런 해명에도 불구하고 공시지가의 최종 공시 주체가 국토부 장관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국토부가 이번 사태에서 책임을 피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이홍규 한국감정평가사협회 이사는 “공시지가 산정에서 정부의 지침을 알릴 때 그 과정을 문서화하지 않고 외부로 알릴 수 없게 돼 있다”면서 “매번 정부의 방침에 따라 부동산 평가가치가 달라지는 부작용이 발생할 것”이라고 했다.
한편 올해 정부가 고가 단독주택 및 토지의 공시가를 대폭 높인 것에 해당 부동산 소유자들의 항의 역시 커지는 모습이다. 감정원의 한 관계자는 “인터넷으로 의견 접수를 받고 있지만 직접 사무실로 찾아와 항의하는 민원인들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공시가격 산정 업무를 담당했던 한 감정평가사는 “서울에서도 강남권, 도심 등 공시가격이 2~3배씩 오르자 반발하는 소유자들이 많다”며 “다만 크게 오르지 않은 서울 외곽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이의신청이 적다”고 말했다. 감정원이 이의신청 건수를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예년에 비해 대폭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정부가 점진적인 인상 대신 한꺼번에 공시가격을 끌어올려 불만이 큰 모습이다. 한 세무사는 “시세의 30~40% 선이던 공시가격을 몇 년에 걸쳐서 올리지 않고 한 번에 70~80% 선으로 직행하겠다는 방침이어서 소유자들의 반발이 크다”며 “강남에서 단독주택(다가구 등 포함) 공시가격이 지난해보다 두 배 이상 상승하는 주택이 많아 보유세가 인상 상한선까지 오르는 경우가 속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완기기자 kingea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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