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시중은행의 디지털뱅킹이 동남아 현지에서 한류열풍 못지않은 관심을 끌고 있다. 본격적인 진출기간은 2~3년에 불과하지만 금융한류가 동남아를 매료하고 있는 것이다.
14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은행의 글로벌 디지털뱅크인 ‘리브 KB캄보디아’ 성공 스토리 못지않게 신한은행이나 KEB하나은행·우리은행 등이 잇따라 신화를 써내려가고 있다. 특히 한류열풍과 마케팅을 접목하자 우리나라 시중은행의 글로벌 브랜드가 용수철처럼 뛰어오르고 있다.
신한은행은 베트남에서 축구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박항서 감독을 현지 모델로 발탁해 지난해 말 모바일뱅킹인 ‘베트남 쏠(SOL)’이 출시 한 달 만에 가입자 11만명을 돌파했다. 현지 은행도 아닌 외국 은행의 모바일뱅킹에 현지 고객이 11만명이나 가입한 것은 경이적이라는 게 금융권의 대체적인 평가다.
신한베트남은행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베트남판 ‘카카오톡’인 ‘잘로(Zalo)’와 손잡고 송금이나 결제(페이) 같은 핵심 금융업무를 추진할 수 있는 플랫폼을 선점할 수 있게 됐다. 잘로는 베트남 스마트폰 사용자의 80%가 이용하는 채팅 애플리케이션으로 카카오톡처럼 단순 메신저 앱에 핀테크를 접목해 송금과 결제가 가능해지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잘로와 업무협약을 체결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사용 패턴을 기반으로 개인 신용등급을 평가한 뒤 대출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SNS에서 맞춤법을 잘 지키는 사람은 빚도 잘 갚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높은 신용점수를 부여해 대출금리를 낮추는 식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베트남에는 제대로 된 개인 신용등급 체계가 없어 제도권 은행보다 사(私)금융 시장이 발달해 있다. 신한은행의 실험이 성공을 거둘 경우 베트남 금융시장의 판을 흔들 수 있을 것”이라며 예의주시하고 있다. 신한베트남은행이 현재 외국계 은행 1위에서 앞으로 현지 토종은행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얘기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조용병 회장이 좁은 국내 시장을 벗어나 동남아 등 해외에서 승부를 걸겠다는 의지를 보여왔는데 베트남에서의 결실로 조 회장의 꿈이 현실화할 가능성이 점점 높아졌다”고 평가했다.
KEB하나은행은 네이버 일본법인인 라인의 금융 자회사 라인파이낸셜아시아와 손잡고 올해 인도네시아에서 디지털뱅크를 출범시킬 계획이다. 수백 개의 섬으로 이뤄진 데 따른 대면대출의 한계를 고객 4,800만명에 달하는 라인을 활용해 뛰어넘겠다는 전략이다. 특히 하나은행은 과거 외환은행 시절부터 확보해온 탄탄한 영업망을 무기로 24개국에서 160개 영업채널을 확보해 지난해 3·4분기 기준 해외에서 2,975억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렸다. 이는 은행권 최대 수익이다.
글로벌 순이익 비중도 16%에 달해 나머지 경쟁자들을 멀찌감치 따돌렸다. 올해는 아시아 신흥시장을 중심으로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는 한편 인도네시아에서 디지털뱅크까지 출범시킬 계획이다.
국내 은행들이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나 아시아 리딩뱅크가 되려는 경쟁도 격화하고 있다. 주택담보대출 같은 전당포식 영업관행을 과감히 벗고 미지의 동남아 시장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은행들은 이미 10여년 전부터 해외시장을 개척해왔지만 금리나 가계대출 총량규제의 압박이 커지면서 해외시장 확대에 대한 필요도 덩달아 높아가고 있다는 지적이다. 시중은행의 한 고위관계자는 “국내에서는 규제간섭이 심하고 이자 장사라는 부정적 인식도 강해 차별화된 전략을 짜기 어렵다”며 “해외 이익 비중을 20% 이상까지 높이자는 게 대다수 은행들의 목표”라고 설명했다.
실제 금융지주 최고경영자(CEO)의 행보를 봐도 해외시장 개척에 대한 열망을 느낄 수 있다. 윤종규 KB금융 회장은 지난해 7월 취임 후 처음으로 싱가포르와 홍콩에서 기업설명회(IR)를 개최했고 이어 미국 시카고·보스턴(11월), 일본 도쿄(12월)에서 잇달아 투자자들과 만났다. 윤 회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지난해 7월 인도 순방 때도 동행해 인도 시장 진출에 강한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KB금융은 금융그룹 전체 순이익에서 글로벌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2% 수준에 그쳐 국내 5대 금융지주 가운데 가장 마음이 급하다.
올해 지주사로 재편한 우리금융도 글로벌 부문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다. 손태승 우리금융 회장은 그룹 내에서 손꼽히는 글로벌 전략통이다. 이 때문에 해외 금융시장의 생리와 자금 흐름을 실무진보다 더 훤하게 꿰뚫고 있다. 우리은행은 지난해 캄보디아에서 ‘비전펀드 캄보디아’를 인수하는 등 해외 네트워크 수를 국내 금융회사 중 가장 많은 430개로 늘렸으며 오는 2020년까지 500개를 돌파하는 것이 목표다. 손 회장은 이날 우리금융지주 출범식에서 “글로벌 시장에서 금융회사를 추가 인수하기 위해 3~4개 정도의 매물을 들여다보고 있다. 2~3년 내 인수합병(M&A)을 통해 1위 금융지주로 도약하겠다”며 거센 경쟁을 예고했다.
전문가들은 은행들의 글로벌 시장 확대를 위해 ‘아시아 포커스(focus·집중) 전략’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특히 장기적 호흡에서 글로벌 전략에만 집중하는 컨트롤타워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김정한 금융연구원 해외금융협력지원센터장은 “국내 은행은 지배구조가 불안정하고 CEO 재임 기간도 3~4년에 불과해 해외사업을 단기적으로 평가하고 근시안적으로 기획하는 경향이 있다”며 “중장기적 안목을 가지고 비전을 세운 뒤 꾸준한 투자에 나서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금융권에서는 IMF 외환위기 당시 태국에 진출해 있던 국내 은행들이 태국 정부의 잔류 요청에도 불구하고 철수를 결정해 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최대 시장인 태국에 다시 진출하지 못하는 것을 가장 뼈아프게 후회하고 있다. 금융당국도 우리 금융사들이 태국 시장에 재진입할 수 있도록 총력지원을 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일범기자 squiz@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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