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원자력계가 신년 인사회를 열었습니다. 매년 열리는 행사지만 특히 올해는 조금 더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원자력법이 제정된 지 60년, 원자력학회 출범 50년,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출이 성사된 지 10년이 되는 해로 축하할 일들이 많은 새해입니다. 하지만 당시 신년 인사회는 축하 분위기보다 위기의식이 감돌았습니다. 그럴 법도 한 게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탈원전 정책을 추진하니, 원전을 짓고 운영하는 한국수력원자력이나 여기에 주요 기기·부품을 납품하는 대기업, 중소기업들 입장에서는 앞으로가 막막할 것입니다. 김명현 한국원자력학회장(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도 이날 “저희 학과의 한 학년 정원이 50명인데 어제 1학년 13명, 2학년 4명이 전과를 신청했다”며 “유례없이 많은 전과 신청자가 나온 건데 원자력계가 처한 현실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상황”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원자력계의 속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발언이 의외의 인물로부터 나옵니다. 여권의 유력 정치인인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의원이 ‘신한울 3·4호기 건설 재검토’에 힘을 싣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동안 원자력계는 신한울 3·4호기가 이미 설계와 부지조성을 마쳐 건설 취소를 할 경우 매몰 비용만 7,000억~8,000억에 이른다며 공사 재개를 주장해오던 차였습니다. 원전 수출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당장 5~10년 동안의 먹거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신한울 3·4호기가 이들에게는 마지막 희망인 셈이죠. 송 의원은 이 자리에서 “미세먼지와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해서 노후화된 화력발전소를 빨리빨리 대체해야 하는데 거기까지 가는 동안 안정적인 원전이 뒷받침돼야 한다”며 “원전산업의 공백기를 메울 수 있는 신한울 3·4호기 건설 등을 다시 한 번 여러 가지로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송 의원의 이 같은 발언에 대해 청와대와 여권에서는 즉각 반박에 나서게 됩니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14일 정례브리핑에서 “원전 문제는 사회적 공론화 위원회의 논의를 거쳐서 정리가 됐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문제가 추가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공론화 과정을 거쳐 결정된 것이기 때문에 (건설 재개) 검토는 조금 더 신중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이들의 발언은 2017년 7월부터 10월까지 진행된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에서 신규 원전 건설을 중단해야 한다는 국민들의 합의가 있었기 때문에 현재 중단된 신한울 3·4호기 건설 재개 논의는 불필요하다는 게 요지입니다.
여기에 원전 전문가들과 송 의원은 재반박에 나섭니다. 청와대와 민주당이 공론화위의 권고안을 확대해석한 것일 뿐 당시 신한울 3·4호기를 중단하라는 권고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공론화 과정에 참여했던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청와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서 “공론화위원회의 법적 근거가 되는 국무총리 훈령을 보면 탈원전 정책이 아닌 신고리 5·6호기의 건설 재개 여부만 논의하게 돼 있었고 신한울 3·4호기에 대한 논의 자체가 없었다”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주한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도 “정부가 국무회의에서 탈원전 로드맵을 통해 결정해놓고 국민의 합의에 근거했다는 설명은 이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신고리 5ㆍ6호기 공론화위원회 구성 및 운영에 관한 규정을 보면 제1조(목적)에 “이 훈령은 신고리 5·6호기 원자력발전소 건설 중단 여부에 관해 공론화를 통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것”이라고 적시돼 있습니다. 이를 근거로 송 의원도 15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공론화위는 신고리 5·6호기 문제에 한정·집중된 위원회이지 신한울 3·4호기 문제가 공식 의제로 집중 논의된 적이 없는 것으로 안다”고 재반박했습니다.
청와대와 여당이 신한울 3·4호기 등 신규 원전 건설 중단을 국민들의 합의 사항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바로 공론화위의 최종 발표에서 나온 ‘원전 축소’ 권고입니다. 공론화위는 2017년 10월 “현재 일시중단 중인 신고리 5·6호기의 건설을 재개해야 한다”면서도 “원자력발전 비중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에너지 정책을 추진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장기적으로 원자력발전 비중을 축소해야 한다는 의견을 낸 것인데 청와대와 민주당은 현재 건설 중인 원전까지도 건설을 중단해야 한다고 확대해석한 셈입니다.
더욱이 신규 원전 건설 중단이 처음 나온 것은 공론화위의 최종 발표 후 4일 뒤에 열린 국무회의에서였습니다. 국무회의에서는 공론화위의 최종 권고를 반영한 에너지 전환(탈원전) 로드맵을 발표하면서 신한울 3·4호기 등 총 6기의 신규 원전 건설을 백지화했습니다. 결국 신규 원전 건설 중단은 국민들의 합의에서 나온 게 아니라 정부의 의사결정이었던 것입니다.
정부 역시 이 같은 사실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산업통상자원부의 한 관계자는 “6기의 신규 원전 건설 중단은 공론화위의 권고를 받아 결정한 게 아니라 대통령의 국정과제에 담겨 있었기 때문에 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사실 공론화위의 당시 권고를 놓고서도 법적 근거가 없다는 월권 논란이 제기된 바 있습니다. 국무총리 훈령에는 공론화위가 향후 탈원전 등 국가 에너지 정책에 대한 방향을 제시할 규정·권한·목적을 담고 있지 않은데다 공론화위 역시 “논의는 신고리 5·6호기에 한정돼 있다”는 발언을 수시로 해왔기 때문입니다.
원전 축소 권고의 근거가 된 설문 결과도 공론화위가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라는 지적도 있었죠. 2만6명이 참여한 첫 번째 설문조사 결과에서는 원전 축소 의견(39.2%)이 원전 유지·확대 의견(44%)보다 적었습니다. 시민참여단만 추린 1차 조사와 3차 조사에서도 결과는 같았다가 마지막 4차 조사에서만 원전 축소 의견(53.2%)이 원전 유지·확대 의견(45.2%)을 앞질렀습니다. 공론화위가 앞선 조사 결과는 무시하고 마지막 조사 결과만을 근거로 원전을 축소해야 한다고 권고를 했다는 비판이 나왔던 이유입니다.
원자력계와 야당은 논란이 커지자 신한울 3·4호기 원자력 발전소 건설 재개를 공론화하자고 나서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난 17일 원자력학회는 ‘최근 탈원전 논란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고 “신한울 3·4호기 건설재개 여부와 합리적 에너지정책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기 위한 공론화를 시작해주길 촉구한다”며 “다시 한번 대통령이 우리나라의 에너지 미래를 걱정하는 진심 어린 목소리에 귀 기울여 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드린다”고 주장했습니다. 김경진 민주평화당 의원도 “정부의 탈원전 정책은 국민 의견을 수렴해 더욱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밝혔습니다. 그는 독일이 탈원전 선언 이후 급속한 산업 이탈이 발생한 2010년대 사례를 들며 “(현 정부의) 과속 탈원전으로 원전밸류체인과 인재풀은 붕괴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신고리 5·6호기 건설 여부를 놓고 다툰 것처럼 신한울 3·4호기에 대한 정책 결정도 공론화를 통해 번복될 수 있을까요. 정부의 입장이 단호해 쉽지는 않아 보입니다. 정승일 산업부 차관은 신한울 3·4호기 건설 재개 논란과 관련해 “에너지 전환 정책은 국민 선택에 따라서 정부 정책으로 확정됐다”며 “신한울 3.4호기는 정부 계획에 반영이 되어 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어 “당분간 일감을 통해서 관련 생태계가 숨쉴 공간 찾을 수 잇을지 모르겠지만 임시방편이라고 생각한다”며 “근본적으로 원전의 안전한 유지 관리, 해체산업, 사용후 핵연료 관리나 투자 인력 양성에 대해서 우리 원전 산업 생태계가 다른 형태의 산업 생태계로 변신하는데 노력 기울여야 하고 관련된 분야에 대한 연구개발이라든지 정부가 최대한 해나갈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실제로 정 차관의 말대로 이미 8차 전력수급계획에서 신한울 3·4호기의 설비계획이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신한울 3·4호기가 과거에 발전사업 허가는 받았지만 앞으로 중요한 실시계획 승인과 건설공사 인가는 현재 상태로는 불가능합니다. 올해 말 수립될 제9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반영돼야만 공사 재개가 가능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탈원전 반대 및 신한울 3·4호기 건설 재개를 위한 범국민 서명운동’ 서명 인원이 30만명을 넘어선 상황이 변수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상당 수 국민들이 신한울 3·4호기 건설 재개를 원하는 만큼 정부도 이를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을 겁니다. 현재 신한울 3·4호기는 공식 절차상 건설 ‘취소’가 아닌 ‘중단’ 상태입니다. 원전 운영사인 한수원이 주기기 납품업체인 두산중공업과 보상 협의를 마무리하지 못해서죠. 이사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사업계획 종결을 해야 끝이 납니다. 신한울 3·4호기 건설이 최종적으로 취소가 된 건 아니라는 겁니다. /세종=강광우기자 press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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